서역 미술탐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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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오따니·고오즈이」(대곡광서)라면 일본에서는 불교교단의 개혁자로, 또 문필가로 유명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탐험가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20세기 초 일본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제22대 종주였던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국내외 정치문제, 취미, 여행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져 전13권의 『대곡광서전집』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1시간에 2백자 원고지로 60여장을 써낼 만큼 정력적이었던 모양이다.
일본 귀족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을 중도에서 퇴학하고 개인교수와 독학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은 그가 불교의 원류를 찾아 중국과 인도를 여행하고 영국에 도착한 것은 1899년.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당시 유럽에는 중앙아시아 탐험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19세기중반 청의 국운이 쇠퇴일로를 걷자 그 단령인 동투르케스탄(서역)에 대한 열강의 관심은 크게 고조되어 많은 탐험대를 파견, 그 옛날 실크 로드의 유적을 하나하나 파헤친 것이다.
런던에서 이러한 실정을 직접 폭격한 열혈한 「오오따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4명의 일본인 유학생을 데리고 1902년 런던을 출발, 모스크바를 경유하여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 그러나 파미르고원을 거쳐 인도에서 불적조사를 하던 중 부친의 부보를 받고 귀국했다. 이것이 그에게 천추의 한을 남겼다.
그가 돈황 부근을 스쳐 지나간 바로 몇 년 뒤에 그 유명한 돈황문서가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즉 11세기 초 서하의 침공 직전 돈황의 한 석굴 속에 숨겨 놓았던 약4만 권의 경전과 고문서가 8백50년이란 긴 세월을 잠자다가 1907년 영국 탐험대의 「스타인」, 그리고 다음해엔 프랑스 탐험대 「페리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오오따니」탐험대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뒤에 쓴 글을 보면 『…귀노에 1주일만 돌면 되는 그 돈황을 놓치고 말았다. 그때 우리일행이 들렀더라면 그 영광은 당연히 우리의 것이었는데…안타깝다』라는 구절이 있다.
「오오따니」는 그 한을 풀기 위해 1913년에 제2차, 이듬해에는 제3차의 대규모 탐험대를 중앙아시아에 파견, 많은 불교 미술품과 경전, 고문서 등 귀중한 학술 자료들을 가져 왔다. 방대한 양의 그 유물은 탐험이후의 재정난으로 정리를 못한 채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당시총독부박물관), 동경국립박물관, 만주려순박물관 등에 분산, 수용시켰다.
이번 국립박물관이 처음으로 공개한 서역 미술품은 그때 탐험대의 일원인 「구하라」(구원방지조)가 1919년에 기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립박물관은 신안 바다 밑에서 건져낸 송·원대 ?물과 함께 서역미술품의 세계적 보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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