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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표현의 자유’ 피로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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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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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절제되지 않은 자유’만큼 파괴적이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게 있을까. 요즘 우리는 절제를 모르는 자유를 온라인상의 댓글 문화에서 본다.

엊그제 끝난 올림픽 기간 중 우리의 ‘댓글 전사’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사이버 폭격을 감행했다. 국내 한 여자 배구선수를 향해 8강 탈락의 책임을 지라며 욕설을 퍼부었고, 축구 8강에서 한국을 상대로 한 골을 뽑은 온두라스 선수나 한국 선수에게 부딪쳐 넘어뜨린 영국 사이클 선수의 SNS계정을 한글 욕설로 도배했다. 어쩌면 한글을 처음 보았을 수도 있는 이들에게 한글은 욕설의 언어, 폭력의 언어로 기억될 거다.

온라인상 소통창구인 댓글은 과거 화장실 벽에 낙서하던 배설의 언어까지 담는다는 점에서 저급한 담론에도 열린 공간이다. 그러니 담론의 수준이 낮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댓글이 온라인의 확장성 덕에 오프라인 세상으로 ‘진격’하며 파괴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댓글에 상처받은 연예인들의 자살이 줄을 이었어도 여전히 폭력적 댓글은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나 이런 과정이 반복되며 요즘은 댓글 공격을 당하는 대상들이 강해지고 있다. ‘비난과 욕설이 나의 앞길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고, 지나가는 시련 정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반면에 폭력적 댓글러들은 공격적 언어에서 폭력적 언어로 이젠 혐오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내는 단계로 점점 더 독해진다. 독설이 무서운 건 남을 파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심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매일 폭력과 혐오의 언어를 내뱉는 이들의 심성은 얼마나 황폐할지 걱정이다.

더 큰 문제는 요즘 이런 온라인 발언 실태를 들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거나 제도적으로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스멀스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헤이트 스피치(혐오발언) 규제 법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남혐과 여혐 논란이 불붙으면서 이런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올림픽 기간 중 사이버 욕설 파동을 보며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모양새다. 유럽과 미국에도 혐오발언을 규제·처벌하는 법안이 있고, 일본에서도 최근 혐한을 막기 위한 헤이트 스피치 방지법이 통과됐다는 점이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탠다.

‘혐오발언과 욕설은 규제해야 할까’. 최근 몇 주가량 틈틈이 스터디한 주제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오락가락했었다. 그럼에도 결론은 ‘표현의 자유’ 일부라도 제도적으로 규제하는 데 동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유럽·미국이 규제법을 도입한 건 우리에겐 없는 사회문제 때문이다. 인종과 종교 혹은 민족 갈등이 유혈사태로 번진 경험. 또 여전히 이 문제가 뇌관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주로 인종과 종교 차별발언을 금지한다. 하나 우리 혐오발언은 유혈사태로 번지는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규제법이 생길 경우 권력집단이 ‘악의적이고 편의적으로 활용할 위험성’이 크다는 걸 더 경계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유신과 5공 시절에 학창 시절을 보낸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아이들이 암기된 ‘대통령 할아버지의 은혜’를 되뇌고, 불온하게 들리는 말을 했다고 친구에게서 ‘고발하겠다’는 위협을 당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 말이 감시당하고 자기검열의 압박감이 내내 지속됐던 그 기억들은 끔찍하다.

물론 지금 같은 폭력적 언사와 혐오발언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데엔 동의한다. 하나 그 방법은 정부의 규제가 아니라 민간 차원의 절제와 자정 노력이 돼야 한다. 자유는 절제하지 않으면 야만으로 치닫는 게 인간사의 이치다. 자유는 거저 누리는 게 아니다. 시민들이 사이버 모욕에 저항하고 언어 폭력의 기준을 만들고 제어하는 시민의식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길,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그 길을 우리가 개척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