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의 미래의 밥상] 육포 맛 강낭콩, 깻잎 아이스크림…과학을 만난 한식 ‘분자 요리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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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출신의 천재 셰프 페란 아드리아(Feran Adria)는 창의적 요리(Progressive Cuisine)라고도 불리는 분자 요리(Molecular Cuisine)를 창시하고 전 세계로 확산시킨 인물이다. 150만 년 전 인류가 불을 사용하게 된 이후 우리는 불을 활용해 음식을 요리해 왔다. 끓이거나 굽거나 튀기거나 찌거나 하는 등의 방식은 모두 불을 활용한 조리법이다. 하지만 페란 아드리아는 요리할 때 불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조리법을 제시했다. 분자 요리의 출발이다.

머잖아 우리 밥상 풍경 바꿀 것

예컨대 재료를 진공 상태에 둬 재료의 엑기스(원액)만을 뽑아내거나, 급격하게 온도를 낮춰 완전히 새로운 질감을 만들어낸다. 미세한 온도 변화를 통해 재료의 특정 부위만 부드럽게 익혀 내기도 하고, 다양한 재료의 미묘한 화학적 반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교하게 설계된 기법들을 통해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맛과 식감이 탄생했다. 거품 형태의 토마토, 액체 형태의 콩, 수십 개의 오렌지를 한 방울로 변환한 디저트 등 기상천외한 음식들이 식탁에 오르게 된 과정이다.

분자 요리는 주방과 과학이 만나 만들어낸 21세기 조리 방법의 혁신이다. 식재료에 대한 관점 자체가 아예 다르다. 해체와 재조합을 통해 식재료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극대화하거나 재미있게 비튼다. 결과적으로 먹는 이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이 분자 요리 기법은 페란 아드리아에 의해 스페인 북부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우리나라에도 몇 년 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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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 요리법으로 만든 아이스크림.

서울의 작은 식당 몇 곳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유학파 셰프들을 중심으로 시도되고 있는 한식과 분자 요리 기법의 만남은 대단히 흥미롭다. 눈 감고 먹으면 육포 맛이 나는 강낭콩 요리가 있는가 하면, 청포도와 조개 관자가 만나 전혀 새로운 맛을 내고 전통적인 구절판의 재료로 멸치 육수 젤리가 올라오기도 한다. 거품 소스로 변형된 된장은 저온 조리된 생선에 얹어져 맛을 끌어올리고, 마무리 디저트로는 깻잎 아이스크림이 등장한다. 한식이 젊은 셰프들의 손에 의해 창의적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소비자들 또한 이 새로운 시도에 열광하고 있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방문하면 전통적인 한정식집이 아닌 이런 창의적 한식당으로 이끈다. 21세기 한식의 새로운 트렌드다.

이런 새로운 조리 방법이 가정집 부엌까지 들어와 우리의 밥상을 바꾸게 될까. 불이 인류의 거주 공간으로 들어와 한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게 된 데까지는 수십 만 년이 더 걸렸다. 불을 활용한 조리가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처음엔 대단히 창의적으로 느껴졌을 테고 또 익숙지 않았을 것이다. 분자 요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자 요리의 다양한 기법이 우리 집 부엌으로 들어오기까지 불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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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밥상 위 오래된 분자 요리 두부.

실은 꽤 오래전부터 분자 요리는 우리 밥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바로 식물성 단백질과 마그네슘을 화학 반응시킨 음식 ‘두부’다. 예부터 콩을 삶아 콩물을 내고 천일염에서 내린 간수와 반응시켜 만들었는데, 간수 속 마그네슘이 콩의 단백질과 화학 반응하며 몽글몽글하게 뭉친 것이 두부다. 전형적인 분자 요리 기법이다. 단맛을 낼 때 설탕 대신 넣는 다양한 과일 ‘청’ 역시 삼투압을 활용한 멋스러운 분자 요리다. 분자 요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밥상 위에 오르고 있었다. <끝>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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