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함평 모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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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모씨는 함평 단일본. 남한에만 1만5천여명으로 성별순위 92위의 귀성이다.
진주모씨·파평모씨·함평모씨·부여모씨·해평모씨등 전국에 11개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세거지가 잘못 전해진 것 때문이다.
20가구이상 집단으로 살고있는 집성촌은 함평군 대동면 연암리 답동을 비롯, 경남 진양군사봉면 등건부락, 전북 남원군 대산면 풍촌리등 30개 마을이 넘는다.
함평모씨의 시조는 충정공 모경이다. 경은 지나 홍경출신.
송나라 휘종때 병부상서겸 호북경서선무사를 거쳐 이부상서를 지냈고 흠종때 대사마대장군에 올랐다.
고려 인종4년(1126년) 척신 이자겸이 왕을 자기집에 데려다놓고 독살을 꾀하는 왕위찬탈음모가 진행될때 사신으로와 이의 음모를 저지하고 왕권을 바로 세우는데 한몫을 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남한에 만5천명뿐>
귀국 후 홍농사에 봉해진 그는 여진의 금나라가 송을 침입, 휘종·흠종 두 황제를 납치해 가자 고려의 힘을 빌어 황제를 구하려고 고려에 나왔다. 그러나 고려조정은 움직이지 않고 귀국길은 막혀 그는 눌러 앉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서훈됐던 경은 고려조정의 후대를 받아 평장사 직첩을 받고 모평군에 봉해졌다.
모평은 백제의 다지현으로 통일신나 경덕왕때는 다기현이 됐고 조선조 태종9년(1409년)에 함개현을 합쳐 함평현이 됐으며 나중 군으로 승격돼 오늘의 전남 함평군이 됐다.
시조 경은 광정·수정·쇄정·상정등 4형제를 두었다.
장남 광정은 고려 의종때 밀직부사를 지낸 기록이 남아 있지만 나머지 세아들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2세 광정은 정린·정호·정조등 3형제를 뒀으나 장남만 고려 명종때 시중전서를 지냈다는기록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며 3세부터 9세까지 모두가 장자의 기록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가운데 6세 여장은 고려 원종때 평장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호는 충렬왕 32년(1306년)에 문료에 급제하여 교관을 역임하고 그 직이 차차 올라 삼군도청제부수가 되었으며 원의 침공때는 전공을 많이 세워 平장사에 오르니 부자 평장사로 부러움을 샀다.
조선조에는 문료 5명, 무료 4명의 급제자를 냈다.
함평모씨의 중시조격인 10세 순은 조선조 태조5년 (1396년)에 생원·진사가 되어 태종 17년(1417년) 문과에 급제, 좌사간에 올랐다.
경남 합천군수를 지냈는데 재임동안 「보릿고개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문을 열어놓아도 도둑이 들지 않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어머니 초계정씨가 종기로 고생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낫게 했고 늙어서 똥을 누자 맛을 보고 환후를 알아냈다고 한다.
또 아버지 세택이 환후로 눕자 병간호를 극진히 했고 약을 구하러 가던중 큰 비가 쏟아져 냇물이 불어나 건널수 없자 하늘을 향해 통곡을 하니 비가 그쳤고 상을 당했는데 강물이 불어 건널수 없어 하늘을 향해 외치니 강물이 흐름을 멈췄다는 전설적인 효도얘기가 전해진다. 그 강은 그런 연유로 절강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나라에서는 경남 진양군 사봉면 등건마을 입구에 정염각을 세워 후손들에게 충효의 사표로 삼게했다.
정염각이 등건마을에 세워지게된 것은 그가 만년에 이곳으로 유배되어 살았기 때문.
순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다음『절강일명 명어해동 종산일발 수양동청(절강이라는 한 이름이 해동을 밝히고 종산의 한 머리칼은 수양과 함께 푸르리)』이라는 시를 지어 보내 은근히 자신을 따르도록 회유했으나 절개를 굽히지 않아 진주의 삼가현에 유배 됐던것.
이때 순은 세아들 가운데 수천을 데려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일파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l8세 정과 19세 극심, 20세 수명, 윤성은 선조25년(l592년) 임신왜란때 가솔을 이끌고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운 의열의 선비.
스스로 소의장군이라 칭한 정은 순천의 예교에서 적을 만나 일격에 무찌르고 여세를 몰아 거제지방의 왜병을 격멸하고 전사,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본보기가 됐다. 전후 병조참판의 벼슬이 내려졌다.
정의 증손 유추는 무과에 급제, 사근찰방, 양덕현감을 지냈고 유추의 조카 일성 또한 무과에급제, 원주병마절제도위, 언양·진해현감을 지냈다.
19세 겸은 세화·세무·세번·세빈·세영등 5남 3녀를 뒀는데 장남 세화는 일찍 죽고 3남세번이 현종10년(1669년)에, 2남 세무는 그보다 6년 늦은 숙종원년(1675년)에 문과급제, 형은 유곡찰방을 지냈고 동생은 흥양현감을 지내 가문을 빛냈다.
21세 수명은 현종때 무과에 급제했고 그의 증손 경관은 영조26년(1750년)에 문과에 급제, 좌랑과 판관을 지냈고 경관의 장남 달겸은 사헌부장령을 지냈는데 바른 말을 잘하고 권신, 간배들을 가차없이 탄핵, 「모장령의 직언」이라는 말을 들었다.

<진주와" 큰집" 다툼>
헌종때 흥갑은 덜미소리를 지르면 1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는 판소리의 명창.
조선조말기의 명필 이삼만에게 사사하여 초서와 해서에 일가를 이뤄 독창적인 「모체」 를 개발한 수명은 만년에 호남지방을 돌며 서법을 가르쳤는데 3개월안에 일정한 수준에 오르지 않으면 수업료 2백냥을 받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 모씨네는 함평과 진주간에 사로 큰집임을 주장, 일가단합이 과제가 되고있다.
함평에서는 10세 순이 진주로 유배됐을 때 데려간 수천이 둘째 아들이고 함평에 남아있던 일천이 장남이라는 주장이고 진주에서는 수천이 장남이고 익천이 둘째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중인 합보작업이 금년까지 6년이 다되도록 매듭지어지지 않아 뜻있는 문중들이 걱정하고 있다.

<지명인사>
(무순·함평·진주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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