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가 먼저다 1부] 토론만 한다고 일자리가 생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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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문제를 보면 참여정부가 코드를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동북아 경제 중심' '지역경제 활성화''소득 2만달러 달성' 등 많은 얘기를 해왔다. 아울러 단기적으론 하반기 중 4조5천억원의 추경예산 집행과 금리 인하.세금 삭감 등 경기부양책도 내놓았다.

모두 일자리를 위한 것은 맞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정부가 다른 한쪽으론 투자할 마음을 싹 가시게 하고 있다"며 "정부의 구호가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따름"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전문가들은 참여정부의 분배 중시 성향에서 나오는 온정주의적 노조정책을 일자리 창출의 최대 걸림돌로 꼽는다.

"노조 편에 설 때 분배가 잘될 걸로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이미 뭉쳐 있는 노조가 큰 빵 덩어리를 챙기면 나머지 조직화하지 못한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에게 돌아갈 분배 몫은 더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나 성장이 잘돼야 분배도 좋아진다는 게 경제학의 정설이 되고 있다."(서강대 남성일 교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7개 회원국 중 한국이 둘째로 정규직의 해고가 어려운 나라로 최근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경기가 좋아져도 신규 채용을 꺼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일자리 창출은 이미 경기의 호황.불황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마르코스 고메즈 주한 유럽상의 회장은 "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면 최소 20년은 안전하다고 확신이 드는 곳에 투자하겠다"며 "한국이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려면 이런 예측 가능성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외국인 투자도 1999년 이후 계속 줄어 지난해는 오히려 국내기업의 해외투자가 외국인 투자액을 앞질렀다.

*** "네덜란드식은 안맞아"

이런 마당에 청와대는 노조의 경영 참여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식 노사 모델'까지 추진하고 있다.

"네덜란드 모델은 일찍이 YS정권 시절 내가 노동부 장관으로 일할 때 충분히 검토했던 사안이다. 결론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DJ 정부도 한국식 노사정위원회를 채택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네덜란드 모델이 노사 문제를 풀 히든 카드인 양 등장한 걸 보니 어리둥절하다."(진념 전 경제부총리)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미국식 시장경제 모델로 구조개혁을 밀어붙여 그나마 이만큼 일어섰다. 일자리를 보다 많이 생기게 하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미국식 모델을 계속 밀고나가는 게 답이다."(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

참여정부의 전반적인 국정 운영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정부에 몸담고 있는 경제 관료들까지 청와대의 독주와 어설픈 상황 대처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철도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던 지난달 30일 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언론에 "노조가 곧 파업을 거둘 것"이라고 확인해 줬고, 실제 그렇게 됐다. 그러나 정작 주무.관련 부처 장관들은 자세한 상황 전개를 잘 모르고 있었다. 노조가 해당 부처를 제치고 청와대와 직거래한다는 소리는 이래서 나온다.

조흥은행 노조가 불법 파업을 했던 지난달 22일 금융감독위원회는 청와대에 공권력 투입을 건의했다. 일요일이던 이날 낮 12시까지만 경찰을 투입해 전산센터를 장악하면 월요일인 다음날 아침 정상 영업에 아무 문제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놨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정부는 노조에 상당 부분 양보하며 타협했다.

*** "노조 - 청와대 직거래"

참여정부 들어 청와대와 각 부처 간에 엇박자가 끊이지 않는 것은 청와대의 조직 개편 탓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은 각 경제부처와 정책 조율을 하던 경제수석실을 없애는 대신 경제 현안별로 각종 위원회와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었다.

동북아경제중심위원회에서 노동개혁 태스크포스팀에 이르기까지 이런 조직이 줄잡아 10개에 달한다. 문제는 이 바람에 토론과 말만 무성할 뿐 책임을 지고 일하는 정부의 모습은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실천과 거리가 먼 토론 공화국.위원회 공화국"(전경련 이규황 전무)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다.

"청와대가 상황 보고는 받는데, 정책 조율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총리를 중심으로 각 부처에 확실한 권한을 주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경제정책을 만드는 중심이 어딘지 우리도 모르겠다."(재경부 고위 관계자)

*** 기업 건의 잘 안받아들여

"일자리는 기업이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일자리 창출의 제1조는 기업이 잘되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국에선 정부가 '논스톱 서비스'창구까지 만들면서 기업과 대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업들이 건의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대한상공회의소 이현석 조사본부장 상무)

李상무는 "정부가 수용했다고 주장하는 건의 중에서도 지엽적이고 부수적인 부분을 받아들인 뒤 '업계 의견을 수용했다'고 하거나 검토 중이라며 시간을 끄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盧대통령은 최근 미국과 중국을 잇따라 방문하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한 경제전쟁의 현장을 목격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졌을 법하다. 그러나 아직 국정 운영 시스템이나 정책 방향에 변화를 줄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특별취재팀=김영욱 전문기자(팀장), 고윤희.정선구.김창우.염태정.김승현 기자(산업부), 남윤호.김기찬 기자(정책기획부), 김광기 기자(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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