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폭·문제점등을 알아본다|집도만 남은 부실기업 수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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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작년12월 정기국회에서 조세감면규제법개정안을 강행통과시간 정부는 24일 전체경제장관들로 구성된 산업정책심의회에서 산업합리화지원기준을 확정함으로써 우리나라경제의「부실」을 수술할 채비를 일단끝냈다.
조세감면규제법 (개정법) 과 공업발전법이 보약으로 준비되어있고 산업합리화기준에 의해 수술대가 마련된 셈이다.
이제는 11명의 경제장관 (산업정책심의회 멤버) 들이 「부실」 산업을 하나하나 수술대위에 올려 집도하는일이 남아있다. 실제로는 기획원·재무·상공 3부장관이 주치의 역할을 맡게 될것이다.
산업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전개될 이번 「부실」 정리는 본격적이고도 전면적인 의미에서 지난69년에 이어 두번째가 되는 셈이다.
69년에는 당시 전권을 위임받은 특별반이 구성돼 약6개월의 단기간에 30개업체를 정리한것인데 반해 이번에는 장기적으로 훨씬 광범위하게 작업을 펼칠 전망이다.
이미 심각한 국면에 빠져있는 부실기업은 물론 앞으로 발생될 문제산업도 모두 수술대에 올려놓겠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향후 전개될 「부실」 정리의 폭과 깊이, 그리고 행방여하에 따라선 우리나라의 산업과 재계의 개편까지도 충분히 예상할수 있는 일이다.
정부가 산업구조조정과 부실정리를 위해 칼을 빼든데는 그나름의 고충과 이유가 있다.
해외건설·합판등 사양산업, 해운·조선같은 구조적 불황산업, 그리고 이들 산업을 뒤치다꺼리하다 멍이 든 은행의 부실화는 더이상 방치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대로 놓아두면 부실기업-부실은행의 연쇄도산은 시간문제일뿐 피할수없다는 판단에 대채로 동의하고있다.
웬만한 해외건설업체 하나 쓰러지면 뒷돈을 대주고 보증서준 은행은 5천억∼6천억원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게되어있는 판이고 그러한 사태가 언제 현실화될지 모르게 상황은 악화되어 있는것이다.
일반은행의 총대출금중 약25%(4조∼5조원) 가 이자와 원금을 제때 받지못하는 부실채권이라고한다면 우리나라 은행의 부실화가 어느정도인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정부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은특융이라는 비상처방을 동원한데이어 부랴부랴 조세감면규제법을 개정, 「부실」 정리에 착수하게 된것이다.
급격하게 바뀌고있는 내외경제환경에서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위해서는, 또 산업과 은행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부실화」 의 소지를 수술하고 산업구조의 조정작업을 해야한다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합리화-부실정리의 대작업을 하겠다는 정부의도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어떤기준에서 어떤 업종과 기업을 어떻게 정리할것인가의 명쾌한 기준도없이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부실」 정리의 작업을 하게될 것이라는 점등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점이 많다.
산업정책심의회에서 마련한 이른바 산업합리화작업을 위한 세가지 기준은 한마디로 「코걸이 귀고리」 식 해석이 가능한 극히 모호한 것이다.
3가지 기준은▲산업구조조정을 위해▲기업군의 계열기업정리 촉진을 위해▲은행보유 부실채권의 원활한 정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조세및 금융지원을 해가며 정리할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은행관리기업이 2백개에 달하고 그밖에도 수많은 기업이 막대한 은행부채에 볼모로 잡혀있는 판인데 어느기준에서 어떻게 칼질 하느냐에따라 향방은 크게 달라질수밖에 없다.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기준에 맞추어 주거래은행이 보유하고있는 채권회수를 위해 적당히 정리계획을 추진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고 산업구조 조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주무부장관 직권으로 합리화의 칼질을 할수있게 되어있다.
물론 최종적으로 결정권을 쥐고있는 산업정책 심의회가 양식을 갖고 객관적으로 판단·처리할것으로 국민들은 기대하지만 사안 하나하나가 어느 특정업체의 사활내지 특혜가 걸린 문제가 되는만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이 쉽지 않게 되어있다.
한예로 작년에 정부가 기업군의 주력업종전문화를 유도하기위해 기업들로부터 신고를 받으려고 했으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결국 좌절한바도 있다.
더구나 「부실」 정리라는것이 지금까지 나타난것처럼 은행부채의 동결-양도세등 세금면제-신규금융지원등 또다른 특혜의 결과를 의미하는가 하면 부실기업 정리에 급급한 나머지 적당한 보상을 약속하면서 「떠맡기기」식으로 밀어붙이는 전례도 많아 비판의 여론이 많다.
따지고보면 우리경제의 큰 짐이 되고있는 부실기업·부실은행의 문제는 관주도경제체제에서 정부·은행·기업 삼자의 합작으로 이루어진것이다.
일이 잘못되었으면 그에 대한 책임소재규명과 인책이 따르고 재발방지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순서인데 그러지를 못하고 패장에게는 훈장을 주고 승장 (건전기업) 에겐 모르는척 할뿐만아니라 결국 국민부담으로 귀결될 처리방안만을 마련해 온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형평의 문제가 있는것이다.
이번의 산업합리화·부실정리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하는것이다.
그래서 지난번 국회에서 조감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격렬한 시비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정부는 이번 「부실」 정리를 하면서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부실채권을 3년이내 청소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나 그렇게 잘되리라고 쉽게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것 같다.
이미 발생한 엄청난 부실채권을 합리적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도 벅찬 일인데다 앞으로 부실채권이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9년의 대규모 부실정리, 72년의 8·3조치, 80년의 중화학투자조정, 그밖에 개별기업별 정리와 조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산업합리화-부실정리를 하게된 것은 근본적으로 산업정책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회비용을 가중시키고 국민부담을 초래하는 부실정리를 반복하기보다는 부실발생을 사전에 막는 정책과 장치가 필요하다.
적어도 양심적으로 건실하게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과 성실한 납세자들의 의기를 저상시키는 일은 없어야한다.
경제논리대로 자기책임하에 투자하고 경영을 잘못해 쓰러지는 기업은 도태되며 정부는 공정한 게임의 심판자 구실을 하는 그런산업 풍토를 조성하는것이 「부실」의 악순환을 막는 길이 될것이다. <이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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