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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대회선 일단 클린턴 ‘판정승’ … 샌더스 지지층 달래기 과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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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호 4 면

28일(현지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가 연단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21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 연단에서 박수를 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AP=뉴시스]

100일간의 미국 대통령선거 본선 일정이 마침내 시작됐다. 공화·민주당은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했다. 이에 따라 두 후보와 양당은 투표일인 11월 8일(현지시간)까지 치열한 본선 캠페인을 벌이게 됐다.


나흘간 미 전역에 생중계된 공화·민주당 전당대회는 유권자에게 후보를 각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본선 경쟁의 전초전이었다. 양당의 전당대회가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되는 가운데 미 언론들은 일단 클린턴의 판정승을 선언했다. 미 일간 US뉴스는 “공화당 전당대회는 당내 분열 양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트럼프의 지지율 상승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민주당 전당대회는 유권자들의 관심을 클린턴으로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며 “클린턴이 전당대회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클린턴에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에게 실망감을 드러낸 버니 샌더스(버몬트) 상원의원 지지층을 달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 18~21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퀴큰론스 아레나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혼돈과 분열의 연속이었다. 개막 첫날부터 전당대회 규정을 놓고 트럼프파와 반(反)트럼프파가 분열 양상을 보였다. 첫 찬조연설에 나선 조니 언스트(아이오와) 상원의원의 연설은 중계방송이 지역 뉴스로 넘어가 전국에 방송되지 못했다. 또 미국의 리비아 공습으로 아들을 잃은 여성이 트럼프 지지를 호소하며 무대에 오른 시간, 정작 트럼프는 한 TV쇼에 출연하며 전당대회 주목도를 스스로 떨어뜨렸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은 전당대회 연단에 올라 지지연설 대신 “양심에 따라 투표하라”는 말로 찬물을 끼얹었다. 또 다른 경쟁 후보였던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와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등 주요 정치인들은 불참했다. 트럼프의 부인 멜라니아, 맏아들 도널드 주니어, 딸 이방카 등 가족들이 연사로 나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멜라니아의 2008년 미셸 오바마 연설 표절 시비로 빛이 바랬다.


반면 지난 25~28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웰스파고센터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는 달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셸,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연단에 올라 클린턴 지지를 선언했다. 클린턴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샌더스 상원의원도 연단에 올라 “나는 그녀(클린턴)와 함께한다”고 강조했다. 메릴 스트리프, 에바 롱고리아 등 인기 연예인들이 찬조연설에 나섰고 팝 듀오 ‘사이먼&가펑클’의 폴 사이먼, 케이티 페리 등 가수들의 공연도 이어졌다.


민주당 전당대회는 클린턴이 당 지도부와 주요 인사의 확고한 지지에 힘입어 트럼프보다 유리한 고지에 올라 있음을 보여 준 자리였다. 클린턴을 돕는 외교안보 자문사단엔 올브라이트, 리언 패네타 전 국방장관 등 전직 고위 관료들이 즐비하다. 클린턴 캠프의 외교안보 자문단 규모가 300여 명이라는 얘기가 워싱턴 외교가에 돌더니 최근엔 클린턴 캠프 스스로 자문단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전당대회장에서 만난 민주당의 마크 김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은 “향후 미국 전역에서 민주당 조직과 상·하원의원들이 클린턴 선거운동에 나선다”며 “혼자 뛰는 트럼프는 하루에 유세를 해 봐야 두세 곳이겠지만 클린턴은 동시다발”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는 “당 지도부의 도움 없이도 나는 경선에서 이겼다”고 자랑하는 인물이다. 전당대회에서 당 지도부의 지지를 못 받았다는 사실이 크게 흠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샌더스와의 경선에서 ‘수퍼 대의원’의 힘에 크게 의존했던 클린턴과 달리 트럼프는 단기필마로 출마해 명문가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주류의 지지를 받은 마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 이단아 크루즈 상원의원을 모두 꺾으며 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경선 과정에서 소수인종의 유입과 줄어드는 일자리에 분노를 느낀 저학력·저소득층 백인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내 충성 지지층으로 만들었다. NYT·워싱턴포스트·CNN 등 주류 언론이 트럼프를 놓고 몇 달째 십자포화를 가하고 있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충성층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트럼프 지지층에 놀란 한 미국의 관료는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다”고 표현했다.


이번 전당대회는 클린턴에겐 성난 샌더스 지지자들을 달래야 한다는 큰 숙제를 남겼다. 샌더스 지지자들은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부터 대회가 열리는 필라델피아 시청 앞에서 ‘네버 힐러리(Never Hillary)’ ‘힐러리를 감옥에(lock her up)’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샌더스에게 불리하게 경선을 진행한 흔적이 담긴 e메일이 폭로된 뒤 성난 ‘버니 시위대’는 통제 불능이었다. 이를 의식한 듯 클린턴은 후보 수락연설 서두에서 샌더스 지지자들을 향해 “여러분의 말을 귀담아듣겠다. 여러분의 관심사가 곧 우리의 관심사다. 함께해 나가자”고 했지만 일부 샌더스 지지자는 끝내 야유를 멈추지 않았다.


클린턴의 승패는 본선 과정에서 샌더스 지지자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린턴은 57개 선거구 가운데 34곳에서 샌더스에게 승리했지만 이아오와·네바다 등 8개 주에선 샌더스와의 득표율 차이가 불과 5% 미만이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경합주(스윙 스테이트)로 꼽히는 10개 주 가운데 콜로라도·뉴햄프셔 등 4개 주에선 샌더스에게 패배했다. 대선의 최대 승부처인 경합주의 40%엔 클린턴 지지자보다 샌더스 지지자가 더 많은 셈이다. 현재 경합주 7곳이 민주당에 우세한 지역으로 분류되지만 만약 클린턴이 샌더스 지지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경합주 5곳 이상을 트럼프에게 빼앗길 경우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작아진다.


샌더스의 주요 지지층은 저학력의 백인 남성으로 트럼프와 일부 겹친다. 이 집단 가운데는 클린턴보다 트럼프를 선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미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 수퍼팩(무제한 모금이 가능한 선거 후원그룹)은 200만 달러(약 22억원)를 투자해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샌더스 지지자들의 스마트폰에 클린턴 비방 광고를 내보냈다. 이 15초짜리 광고엔 “클린턴이 직접 임명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이 2만 건의 비밀 e메일로 선거를 조작했다. 클린턴 때문에 샌더스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문구가 담겼다. 이 광고는 이날 플로리다·오하이오 등 8개 주의 샌더스 지지자들에게도 노출됐다.


분노한 백인들에 힘입어 트럼프가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화씨 9/11’ 등 다큐멘터리 영화로 유명한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가 미시간·오하이오 등 중서부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 유권자들을 겨냥해 힐러리의 자유무역협정(FTA)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지지를 공격하는 작전이 먹힐 것”이라며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예측했다. 무어는 “막상 선거날 아침이 되면 화난 백인 남성들이 흥분해 (트럼프를 위해) 대거 투표를 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필라델피아=채병건 특파원서울=이기준 기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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