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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먼저다-1부] 1. 넘쳐나는 실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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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현대자동차는 1조4천억원을 들여 미국 앨라배마주에 연산 30만대 규모의 자동차 공장을 짓고 있다. 중국 베이징(北京) 공장은 지금은 연산 5만대지만 2010년까지 55만대로 생산 능력을 늘릴 계획이다.

이처럼 밖으로 나가는 것은 현지에서 생산해 수출하겠다는 세계화 전략의 일환이지만 기업을 대하는 정부 정책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장 부지의 무상 지원은 미 앨라배마주법에 위배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1999년 주법을 개정해 현대 공장을 유치했다.

그러나 한국에선 삼성전자가 수도권에 소재한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겠다고 하자 국토의 균형 발전에 위배된다는 정부 목소리가 높다. 또 앨라배마주는 정부가 나서서 '노조 없는 공장'설립을 약속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세력 간 힘의 균형'을 주장하면서 노조와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한다. 미국 측은 그 대가로 현대차 공장의 일자리 6천개를 얻었다. 대신 우리는 그만큼의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이처럼 일자리가 말라가고 있다.

전통.사양 산업만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다. 첨단 전자 업체들도 빠져나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톈진(天津).선전(深)등 해외 생산기지가 35곳에 달하고, LG전자는 중국에만 12개 공장을 거느리고 있다.

삼성.LG전자의 해외 공장 직원은 5만7천여명에 이른다. 섬유.전자부품 중소기업이 많은 구미공단 관계자는 "본사만 한국에 남기고 생산라인은 중국 등으로 옮기는 추세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나 노조 등은 기업 성장에는 국민의 희생이 컸다면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한국에서 사업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이구동성이다. 경기도 안산의 한 중소 부품업체 사장은 "기업하는 사람에게 우리나라의 경영환경은 매우 심각하다"고 말한다.

국내 기업도 나가는 판에 외국 기업이 들어오긴 쉽지 않다. 세계적인 스포츠 그룹인 휠라는 홍콩에 있는 아시아 본부를 서울로 옮기려다 포기했다. 휠라 본사를 공동 인수한 사람이 한국인인 윤윤수 휠라코리아 대표였기에 성사 가능성이 컸지만, 尹대표는 "한국이 아시아의 경제 허브가 되기엔 제약이 많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내몫부터 챙기자'는 노조 이기주의도 일자리 창출의 걸림돌이다. 다국적 식품회사인 한국네슬레는 지난 7일부터 파업 중이다. 회사가 아웃소싱(외주)을 추진하려 하자 노조가 고용 보호를 요구하면서 파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위스 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국의 청주 공장은 전 세계 10여개 커피 공장 중 한때 경쟁력이 가장 높았지만 지금은 중간 수준이다. 그래서 돈 안 되는 사업은 접고, 새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는데 노조가 고용보장을 요구한다면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고 회사 측은 설명한다. 이 회사는 상황이 나빠지면 공장 철수도 검토할 것이라 한다.

주한 외국 기업인들은 "노조가 수익 및 생산성과 무관하게 높은 임금 인상을 매년 요구하고, 워크아웃 기업에서조차 파업이 한달째 계속되는 한국에 어느 기업이 투자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연세대 김농주 취업담당관은 "노사 문제가 고용 사정을 악화시킬 것으로 걱정하는 취업 준비생이 많다"고 말했다. 자신의 임금과 고용 보호만 따지고, 미래의 일자리는 나 몰라라 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크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고용 창출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잡고 있는 선진국처럼 참여정부도 국정 코드를 '일자리 문제'에 맞춰야 한다"고 주문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상우 연구원은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의 유연성 확보도 과제다.

자유기업원 김정호 원장은 "해고가 자유롭게 되면 당장은 힘들겠지만 결국은 '창조적 파괴'과정을 통해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밝혔다.

실업률이 3%대로 선진국보다 낮아 심각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선진국과 같은 고실업 사회가 곧 닥칠 것은 명약관화하다.

경제성장률 1%당 5만~7만명의 고용효과가 있기 때문에 올해 성장률이 5%대에서 3%대로 둔화되면 10만여명의 일자리가 줄어든다. 저성장은 곧 고실업을 부르는 시한폭탄이다.

이 때문에 박상용(연세대)교수는 "향후 10년간은 고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 기업연구센터 소장은 "문제는 시간이요, 행동"이라면서 "기업들이 다 빠져나간 뒤엔 백약이 무효"라고 말한다.

특별취재팀

김영욱 전문기자(팀장), 김시래.정선구.이원호.염태정.김승현 기자(산업부), 남윤호.김기찬 기자(정책기획부), 김광기 기자(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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