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는 정·경의 실력자였다"|「천년전의 활약상」사학자 10명이 합동연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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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장보고는 누구인가. 그를 알고자 하는 일반의 열의가 높아가는 가운데 일군의 학자들이 종합적인 연구작업을 마쳤다. 그를 싸고도는 1천년의 안개를 걷어내 그 실체를 밝혀 보고자한 전남 완도문화원(원장 황하국)이 2천만원을 들여 벌인 사업이다. 완도는 바로 장보고가 활약했던 옛 청해진터. 김양옥(국사편찬위) 강영철(〃) 김광수(건국대) 이기동(동국대) 김재근(전 서울대) 방동인(관동대) 정태헌(국사편찬위) 최근영(〃) 민덕식(〃)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씨 등 10명의 학자가 참여, 최근『장보고의 신연구』를 펴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당시 장보고는 매우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신라왕실과는 통혼을 통해 동격의 자세로 신라조정에 참여코자 했다 (김광수「장보고의 정치사적 위치」).
장보고 세력의 기초는 당나라 적산포중심의 산동반도 연안에 이주한 신라인과 그가 귀국 후 근거지로 삼은 완도중심의 청해진관할 하의 서남해안지역 주민들로 구성됐다. 이들 양지역의 신라인들은 신라의 지배체제로부터 이탈선상에 있던 유동적 세력이었다. 장보고는 무주의 해양을 영역으로 그들을 결속했다.
장보고는 완도출신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지배체제 하에선 한낱 미천한 해도인이었으나 지역적으로는 토착지배층인 호족출신으로서 그의 조상은 일찍부터 대당교역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일찌기 20대에 도당, 30세에 서주절도사 휘하의 무령군 소장이 됨으로써 득명했다. 820년대 초반엔 적산포를 중심으로 해상에 투신, 그곳 신라인을 규합해 일단의 해상세력을 형성했다. 신라 흥덕왕3년(828년) 해로의 요충이던 완도에 해적소탕을 이유로 청해진개설을 자청, 그「대사」에 임명됨으로써 정치적으로도 인정되는 확고한 세력기반을 구축했다. 이때 흥덕왕이 주었다는 졸1만이란 이만한 병력을 동원할만한 민병조직으로 이해된다.
결국 장보고 세력은 나-당의 접합부분에서 성장해 골품제에 기초한 신라의 기존지배체제의 외곽에 존재하던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집단이었다. 「청해진대사」란 것도 신라 관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이고 독립적인 직명이었으며 해적을 소탕한다는 의미의「청해」 역시 모든 해상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장보고는 왕위계승전의 와중에서 신라 정계에 일정한 관여는 하고 있었으나 결코 신라 조정 내로의 진출을 꾀하지는 않았다. 신라측으로선 신분상 그를 그들의 기존관직체계 내로 편입시킬 수 없었던 반면 장보고 역시 독자적인 번진의 위치에 만족함으로써 한동안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신라왕실과 통혼을 기도함으로써 양자의 공존관계는 한계에 도달했다. 신라왕실이 여기에 긍정적이었음에도 이 사건은 신라지배체제의 근저를 이루는 골품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전신라 지배층의 이해와 대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장보고는 중앙에서 밀파한 염장에 암살당함으로써 중앙귀족과 지방호족의 연합세력에 의해 괴멸됐다(841년).
한국사에서 이 시대는 민중세계가 갖고 있던 왕성한 에너지를 유감 없이 발산했던 때다 (이기동「장보고와 그의 해상왕국」). 특히 해외진출과 교역활동 면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그었다.
장보고는 한·중·일 3각무역을 완전히 지배했다. 「라이샤워」박사는 이 청해진세력을 「상업제국」으로, 장보고를「상인군주」로 이름 붙였다.
대무역업자로서 장보고는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놀라운 성공담은 당시 중국인사이에서도 회자됐으며 저명한 당시인 두목은 그의 얘기를 작품으로 남겼고, 일본구법승의 기행문에도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장보고는 도자기무역의 중요성에 착안, 당의 월주에서 도공을 데려와 강진에 가마를 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청해진성은 완도 동해안의 중간지대인 완도군 완도읍 장주리에 위치한다(최근영·민덕식「청해진의 역사적 고찰과 그 성의 분석」). 장좌리에서 동으로 1백70m떨어진 10만4천8백78평방m넓이의 장도란 섬 전체를 이용, 독립된 성을 구축했다. 물이 들어오면 수심이 1∼1.5m에 달하나 물이 빠지면 개펄이 드러나 본섬인 완도 장좌리와 연결된다.
바다를 자연의 해자로 이용한 유일한 성. 장도 동편은 70도 경사의 단애이며 북·남해안도 60∼70도의 경사로 접근이 어렵다. 정문터와 사당 및 장대가 있었을 정상부, 망루가 위치했을 고대, 선착장과 샘터 등의 흔적이 확인됐다. 특히 남쪽 해변일대에서 방책기능을 했던 원목렬과 초소의 일종인 노의 구조물 2개소도 찾아냈다. 장도와 본섬인 완도사이엔 나무다리가 놓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해진성은 진병이 주둔했던 군영이라기 보다는 장보고의 거성이었다. 군영터와 항만터는 장좌리 일대에, 조선소터는 이웃 청비리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연구결과를 내놓은 황하국문화원장은『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토대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학계의 지속적인 연구를 기대했다. 현지인들은 현재 민간인들의 소유로 돼있는 장도를 국가에서 사들여 확실한 보존책을 강구해줄 것을 희망했다.

<완도=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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