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개혁파 체제내 혁신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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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며칠전 검찰은 국회내의 행동을 문제삼아 제1야당소속의원 7명을 기소한바있고 이에 대하여신민당은 「양외」 투쟁을 감행할것을 밝히고있어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각기 이유야 있겠지만 일반국민의입장에서 보면 뭔가 이나라 정당정치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조짐마저 느끼게 한다.
서방진영에 속한 나라들에 한정해볼 경우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당정치를 보면 알수있다.따라서 좀고통스럽긴하지만 현재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국회의 모습이 바로 우리 정치의 수준이라는 것을 솔직이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한 현실인식의 바탕위에우리의 실정에 맞는 여당과 야당의 존재이유를 확인하고 인내를 갖고 정당정치의 나무를 가꾸어나가야지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성급한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난 1년간의 국회를 돌아보고 다가올 정국을 전망함에 있어서 우리는우리 정당정치의 현실에 걸맞는보수와 혁신의 의미를 한번쫌 심각하게 따져볼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방후 우리의 정치사를 보면 보수와 혁신이란 말이 너무 안이하게 쓰여온것 같다.
보수는 오랜 반공모럴리즘의 문화속에서 좋든 궂든 한국정치의운명적 노선처럼 되어왔고,바로이 보수정치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때문에 반사적으로 혁신이 청년들을 비롯한 적지않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매력있는 말로 받아들여져온 것도 사실이다. 보수가 현존질서를 유지하는데 역점을 둔다면 혁신은 현상을 수정또는 변혁하려는 주의 주장을 의미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정당정치에서 보수와 혁신의 역할을 담당하는 세력은 과연 어떤 집단인가. 어떤 사람은 한국의 모든정당을 통틀어 보수세력이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민정당을 해방후 한국의 집권보수 세력의 연강선에서 보고,신민당의 주장속에서도 혁신세력의 면모를 발견할수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최근엔 신민당에서 탈당한 일군의 의원들이 「신보수회」 란 이름을 늘고 나왔다.
아뭏든 문치정치의 역사가 길고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중인 한국에서 국민의 의식수준이 날로 높아가고 그에따라 밑으로부터의혁신걱 요구가 증대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여야 정당은어떤 형태로든 이러한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흡수할 수 있어야한다.
우리의 정치체제가 안팎의 도전에 자신을 갖고 대처해 나가려면 집권여당은 부단한 자기개혁을 통하여 산업학시대의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수 있어야하며야당은 밑으로부터의 급진적 요구를 여과할수 있는, 말하자면 체제내 혁신정치의 추진세력이 되어야 할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대 보수정권은 장기집권으로 기존질서를 부당하게 유지하려고만했지 질서돠 진보,질서와 개혁을 불가분의 관계에서 파악하는데 익숙하지 못했고, 그래서 대한민국 수립후 보수정권 40년이가까와와도 참다운 의미의 보수정치는 뿌리를 박지못하고.있다.
질서는 진보의 조건이요,진보는 질서의 목적이라는 「콩트」식의 보수적 사고도 없었고 보다 효과적인 반공을 위해 일본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던 군인정치가 「맥아더」 의 보수정치에서도배운 것이 없다. 발상의 빈곤이란 점에서는 야당도 마찬가지였다.역대 우리의 야당에는 원칙을 지키면서 타협할줄 아는 현실주의도 없었고, 체계적인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이상주의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원칙적 현실타협을 하거나 무의미한 명분을 고집하다가 분열을 자초했을 뿐이다.그래서 「사꾸라」 와 이른바 「지조파」는 있었어도, 이를테면 이탈리아 제1야당인 공산당이 집권보수당과함께 실현을 본 「역사적타협」같은 정치행태는 찾아볼수 없다.
보수와 혁신이 현실정치의 어쩔 수 없는 양면이라면, 더우기계급정담도 이념정담도 존재하지않는 한국에서 건전한 정치적 다이너미즘을 재생산해나가러면 뭐니 뭐니해도 보수의 역할을 해야할 정당은 짐권여당일것이고,혁신의 기능을 떠맡을 세력은 야당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러한 보수와 혁신의 균형이 깨지면 남는 것은 양극단, 즉 물리적인 힘에만 의존하려는 초보수주의내지 반동주의와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급진주의내지 혁명주의뿐일 것이다. 이 양극적 대결은 반드시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게되고 끝내는 망국을 초래할 수도 있다.
절대다수의 국민은 이 양극단의 비극을 원치않는다. 나는 여기에 제3의 대안을 내놓을 수있는 입장에 있지않지만 분명한것은 여야간에 대타협이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이경우 타협은 개인수준의 도덕적 변절이나관용이 아니라 국가수준의 통합을 위한 정치적 기술이기때문이다. 「비스마르크」 가 말한 「가능성의 기술」 도 결국 정치란 타협을 통하여 불가능한 최선보다가능한 문선을 택하라는 경종을암시하고있다.
정치체제의 안정과 능력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여야 정치세럭이 보수와 혁신의 역할을분담함으로써 동태적 균형을 이루면서 이성과 지혜로 정국을 끌어나가야할 것이다. 향후 2년은실로 백척간두에 서있는 한국의민주주의를 실험해보는 곁정적인전기가 될 것이다. 지도자와 국민의 역량에 따라서는 이 위기를 호기로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걱겅이 태산갈지만 한가닥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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