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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아와 짝꿍 수업…“손 잡기도 꺼렸는데 친구 됐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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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조금만 힘내, 여기만 통과하면 결승점이야.”

특수학교와 통합수업 세경고
꽃동네 봉사 등 협동·배려심 키워
교칙은 토론으로, 벌은 자치법정서
어린이재단 교육법 도입 숭례초
친구가 괴롭힐 땐, 집밥 맛없을 땐…
역할극 통해 이해심·소통능력 길러

지난 15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새얼학교 실내체육관. 인근의 세경고 박진철(18)군이 자폐성장애아인 경수(18·가명)군의 손을 꼭 잡고 장애물을 넘었다. 박군은 이어달리기의 마지막 주자. 앞구르기 코스에서 매트 밖으로 쓰러진 경수군을 일으켜 세우느라 진땀을 뺐다. 다시 손을 꼭 잡고 뛴 두 친구는 무사히 결승점을 통과했다. 박군과 경수군이 속한 청팀의 승리였다.

매 학기 진행되는 두 학교의 통합교육 시간엔 두 학생씩 짝을 이뤄 하루 동안 수업을 듣는다. 이날 박군은 오랜 친구처럼 경수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1학년 첫 통합수업 때만 해도 박군은 내심 불편했다. “처음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컸습니다. 그땐 손잡기도 꺼려졌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제 또래의 똑같은 친구인걸요.”

세경고는 2010년 파주공고에서 교명을 바꾸고 인성교육을 최우선 목표로 내세웠다. 이 학교 박기범 교육연구부장은 “인성교육에 집중하며 기피 학교에서 인기 학교로 탈바꿈했다”며 “학생 스스로 협동·배려·공감 같은 인성 역량을 키우도록 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 학교는 덕목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윤리교육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해 자기주도적 인성교육을 한다. 그런 덕분에 내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던 박군은 이 학교 진학 이후 180도 달라졌다. 모든 신입생이 참여하는 꽃동네 봉사활동 이후 남을 돕는 즐거움을 알았다고 했다. 봉사동아리에서 2주에 한 번씩, 노인·장애인 복지시설을 찾으며 사회복지사의 꿈을 꾸게 됐다. 박군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만날 싸웠던 남동생과 다투는 일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선 교칙도 해마다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다. 지난 1월 세경고 대강당에선 학생·학부모·교사 900여 명이 교칙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학생회의, 학부모·교사 대표회의를 거쳐 올라온 안건을 놓고 토론했다. 투표를 통해 ‘여학생 기초 화장 허용’ 안건이 부결됐다. 정해진 교칙을 어기면 학생 검사와 판사, 변호사로 이뤄진 자치법정에서 처벌 수위를 결정한다.

학생들은 고민거리가 생기면 반마다 배치된 ‘또래상담사’들에게 상담한다. 또래상담사인 김나현(18)양은 “어른들에게 말 못할 이야기도 또래상담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며 “상담활동을 하면서 책임감과 이해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다양한 인성교육을 통해 세경고의 인성 수준(만점 100점)은 2013년에서 2015년 사이 행동(53.7점→64.7점)과 인지(48.2→56.2점) 두 영역 모두 크게 올랐다. 학교폭력 건수도 2013년 20건에서 지난해 0건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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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울 숭례초에서 진행된 인성교육 수업. 학생들이 각자 친구나 부모님과 장난감·뽀뽀 등 어떤 것을 서로 나눌지 스티커에 적어 붙이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서울 성북구 숭례초는 올 초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개발한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학생들의 ‘인성 역량’을 키우고 있다. 지난 11일 오전 이 학교 2학년 교실에선 학생 20여 명이 둘씩 짝지어 책상에 놓인 지도를 바라봤다.

신동현(8)군이 연필을 쥔 김은재(8)양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한 뼘만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김양은 신군의 설명만 듣고 지도에 그려진 목적지를 연필로 찾아갔다. “눈을 가리니 답답하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동현이가 설명을 잘해줘서 무사히 성공했죠.”

이날 학생들은 역할놀이와 토론을 통해 협동과 배려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쳤다. “다리를 다쳤는데 친구들이 도와줘서 함께 바람개비를 만들었어요”(이규빈), “엄마가 도토리묵 요리하시는 걸 도와드렸어요”(양희재) 등 다양한 사례를 발표하고 서로의 잘한 점을 칭찬했다. 이규빈양은 “동생과 장난감을 갖고 놀다 싸워 혼이 났는데 수업을 듣고는 규칙을 만들어 더 재미있게 놀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자 담임교사는 “저학년들은 상대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해 다투게 되는데, 역할극 등으로 서로 공감하게 되면서 관계가 원만해진다”고 말했다.

어린이재단은 2014년부터 역할극과 만화그리기 등 체험형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학교·어린이시설에 제공하고 있다. 올해 2만5000명을 교육하는 것이 목표다. “엄마가 해준 밥이 맛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가 괴롭힐 땐 무엇을 해야 하지” 등 갈등 상황을 제시하고 학생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도록 돕는다. 어린이재단 허은혜 연구원은 “문제 해결력과 의사소통 같은 현실 생활에 필요한 역량을 기르는 것이 인성교육의 목표”라고 말했다.

글=윤석만·백민경 기자 sam@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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