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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골치 아픈 도로명 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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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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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만 해도 서울은 외국인에게 걷기 끔찍한 도시였나 보다. 88올림픽 직전 뉴욕타임스(NYT) 여행 섹션에 실린 서울 소개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 사람들은 아무도 그냥 걷지 않는다. 팔꿈치와 턱을 치켜들고 빠르게 걸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도시에선 조심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던 서울이 달라졌다. 아니,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서울에서 뭐할까’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게 서울 사람의 무례함과 북한 테러의 위협만 잔뜩 늘어놓았던 당시 기사와 달리 바로 지난 주말 같은 신문에 실린 ‘서울에서 주말 보내기(36 hours in Seoul)’에서는 서울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저평가된 도시였지만 패션에서부터 연예산업에 이르기까지 아시아를 휩쓰는 한류 덕분에 관광산업 붐을 만끽하고 있다. …서울을 찾기 더없이 좋은 때다.”

악의가 호의로 바뀐 건 분명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길 찾아가기에 대한 불만은 여전하다는 게 재밌다. 28년 전엔 “끝없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며, 지하도 없이는 큰길을 건널 수 없기 때문에 걷기가 어려운 데다 빈 택시 잡기도 어렵고, 지하철이라고 어디나 다 가는 게 아니다”며 교통 인프라를 문제 삼았다. 그런 불편사항은 많이 개선됐다. 지하도 없이 지상의 횡단보도로 쾌적하게 건널 수 있고, 오히려 빈 택시가 손님 태우기 경쟁을 할 때가 많고, 지하철은 그야말로 안 가는 곳이 없다. 그럼에도 NYT는 이렇게 꼬집는다. “(도로명) 주소만으로는 목적지를 찾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내비게이션 기능이 있는 스마트폰 렌털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는 2014년 과거의 지번 주소를 대체한 도로명 주소를 도입하면서 “합리적이고 편리한 제도라 홍보만 제대로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정착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면 적용한 지 벌써 3년째인데 실생활에선 여전히 겉돌고 있다. 주소만 봐선 실제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게 붙은 엉뚱한 길 이름, 다가구주택이나 원룸엔 제대로 부여되지 않은 가구별 상세 주소, 오류가 빈번해 인내력 테스트 수준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웹사이트 입력 문제 등 도입 당시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여겼던 문제가 여전한 탓이다. 쓰기 불편하다면 아무리 널리 알려도 이용하지 않는다. 과거 주소체계를 모르는 외국인조차 도로명 주소로 길 찾기를 포기해야 할 정도라면 더 말해 뭐할까.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