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 바꿔 먹은’ 진경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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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31면

처음에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주식투자로 126억원을 벌다니…. 친구만 믿고, 앞날을 모르는 벤처기업에 선뜻 전 재산을 털어 넣어 복을 받았구나 했다. “자기 자금으로 주식 투자한 게 무슨 문제냐”는 민정수석실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망이 불투명한 벤처기업이 아니었다. 주식을 매입할 당시 이미 매년 수백억 원씩 흑자를 내는 기업이었다. 비상장주식을 사는 것만으로도 특혜라 할 만했다. 자기 자금이라던 돈은 처가에서 빌린 돈이 됐다가, 넥슨에서 빌린 돈이 됐다가… 결국 김정주 NXC회장까지 검찰에 불려오자 ‘그냥 받은 돈’이 됐다.


진경준 검사장-. 그에게서 부패의 냄새를 맡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내가 그 취재를 담당한 기자가 아닌 게 다행이다. 믿을 수밖에 없는 ‘설마’였다. 검사가 많으니 그 중에 한 명쯤 일탈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다. 검사장이라면 차관급이다. 청와대에서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자리다.


고위직에 오를 공직자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돈과 명예,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은 사람이 차관급 자리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속을 수 있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동료는 낌새는 알았을 것 아닌가? 더구나 눈이 밝은 검사들이. 이제와 주변에서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런데도 걸러지지 않았다.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진경준이 얼마나 더 있을지….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99%는 개·돼지”라고 했다지만 이거야말로 1%의 배신이다. 배만 불려주면 된다는 99% 개·돼지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라 자기 배만 채웠다. 그는 드러난 것만 수백억원을 챙겼다. 주식을 받고, 자동차까지 받으면서 그는 누구를 위해 일했을까? 돈이 말한다. 돈을 주는 사람을 위해 일한다. 그는 검사장이 아니라 넥슨과 한진과 또 다른 기업의 변호사였다.


돈이 부리는 공무원이 정부청사를 채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국토교통부 관리는 돈을 주는 자기 주인을 위해 도시계획을 세우고, 도로를 놓을 것이다. 재정당국은 주인의 기업 곳간을 예산으로 채워주고, 금융당국은 주인에게 싼 금리로 자금을 밀어주고, 부실기업을 정리한다며 빚을 탕감해주고…. 국방부는 총알이 쑹쑹 지나가는 방탄복, 터지지 않는 포탄, 물이 새는 군화를 돈을 주는 주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사들일 것이다. 99%가 억울한 일을 호소해도 검찰·경찰은 주인 눈치를 보며 묵살하고,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설마 그와 비슷한 일이 생겨도 다 이유가 있다고 믿어왔다. 설마 공직자가 국민을 배반했으랴. 설마 높으신 나리가 개·돼지의 주머니를 털어 1%에게 바치랴. 한두 마리 미꾸라지가 있어도 공직사회는 튼실하겠거니. 그런데 이제 그 동안 벌어졌던 일들이 모두 의심스럽게 됐다. 국민을 배신한 공직자가 ‘돈을 주는’ 자기 주인을 위해 한 짓은 아니었을까?


수백억원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몰수당하면 억울할까? 자수서(自首書)도 아닌 자수서를 낸 걸 보면 법률 전문가답게 형량을 계산한 모양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없다. 패가망신(敗家亡身)-. 대통령과 당당하게 ‘맞짱’ 뜨던 젊은 검사들의 기개에 오물을 끼얹어놓고 비리로 모은 재산을 아까워할 건가.


곳간에 쌀을 쌓으려면 쥐부터 잡아야 하고, 나라 살림이 나아지려면 예산 도둑부터 잡아야 한다. 쥐에게 생선을 상납받는 고양이로는 곳간을 지킬 수 없다. 어떤 공직자의 비리보다 개탄스러운 이유다. 검찰은 수사권·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다. 고위직 인사들의 청렴성을 검증하는 것도 그들이다. 그 검찰의 고위직 인사가 돈 있는 사람 종살이를 하는 마당에 부패 척결, 국가 미래를 어디에서 찾을 건가.


가장 어이쿠 싶었던 건 검사가 사건을 ‘엿 바꿔 먹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가장 비난 받을 일은 기사를 ‘엿 바꿔 먹는 것’이다. 비판 기사를 써놓고, 광고나 협찬과 바꿔먹는 것이다. 옛날 엿장수는 쓰지 못하는 고물을 받고 엿을 잘라줬다. 달콤한 엿이 먹고 싶은 어린아이가 쓸만한 물건을 들고 가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지각 있는 어른이 성한 물건으로 엿을 바꿔먹지는 않는다.


진경준 검사장은 2010년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시절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상속세 포탈과 관련한 제보를 대검에서 받았다. 그런데 사건은 내사 종결됐고, 진 검사장의 처남은 이때 만든 회사로 한진으로부터 지금까지 134억원 상당의 청소용역을 따냈다고 한다. 음식점을 하던 처남이 갑자기 청소회사를 만들고, 대기업으로부터 용역을 따낸 것이다.


거래를 주도했다. 기업인의 꼬임에 넘어간 게 아니다. 내사 당시 진 검사장을 수 차례 만난 한진 간부는 검찰에서 “진 검사장이 처남에게 일거리를 주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아예 작정하고 사건을 엿 바꿔먹으러 나선 것이다. 인지(認知)사건도 아닌 하명(下命)사건을.


아는 놈이 무섭다. 그는 전문성을 철저히 이용했다. 도둑 잡는 기술을 도둑질하는데 쓴 것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금융 프라이버시권에 관한 연구-자금세탁방지제도를 중심으로’다. 자금세탁 방지가 전공이다. 부정축재학을 배운 꼴이 됐다. 배운대로 자금을 세탁했다. 넥슨에서 주식을 받은 뒤 주식대금인 것처럼 입금해줬다. 그러고는 차명 계좌로 돌려받았다. 넥슨 아닌 다른 회사 주식도 차명 거래한 혐의가 있다. 처남 명의의 청소용역회사도 사실상 부인이 운영한 것이란 의혹이 있다.


세상이 아귀다툼을 해도 힘 없는 서민은 정부를 믿는다. 부패한 관리가 불친절하고, 행패를 부려도 고위공직자는 다를 거라 믿는다. 정치가 개판이라도 비리를 잡아내는 검찰·경찰이 있기에 안심한다. 그러나 검찰 고위공직자가 사건을 들고 가, 엿을 바꿔먹고, 주식과 자동차를 바꿔먹는다면 절망만 남는다. 진경준이 간첩보다 위험한 이유다.


공무원이 도둑놈인데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겠나. 그런 공무원 배를 채우려고 누가 세금을 낼 건가. 검찰의 비리를 단속할 장치가 필요하다. 기소독점권을 팔아먹지 못하게 궁리해봐야 한다. 이 참에 김영란법에서 빠진 이해충돌방지조항도 살려야 한다. 서민이 믿어줄 꼬투리라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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