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 모욕 말라, 어제 적이 오늘 친구 된다” 환희의 절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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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깊은 곳에 조성된 승리공원의 대형 석상(2009년 건립). 지압 장군(앞줄 중앙)의 1954년 승전기념식을 재현. 승리 주역 25명이 조각됐다. [사진 박보균 대기자]

디엔비엔푸 전투는 끝났다. 베트민군의 결정적 승리다. 드라마는 새로운 반전(反轉)을 준비한다. 프랑스군의 항복 6일 뒤, 1954년 5월 13일. 최고 사령관 지압은 밀림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곳에서 승전 기념식을 가졌다. 지압의 지휘본부 근처다. 산속 깊은 곳이다.

승전 기념식, 상식 깨고 밀림 속에서 한 까닭

승전식 무대의 통상적 콘셉트는 과시다. 전투 현장의 기념식에선 포로들이 등장한다. 그것으로 승리의 쾌감은 치솟는다. 지압은 그런 상식을 깼다. 프랑스군 포로는 1만 명을 넘었다. 지압의 기념식은 포로들과 분리됐다. 그것은 호찌민의 지혜이기도 하다. “우리 군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하라. 그러나 포로가 된 프랑스군을 모욕하지 말라-.” 그것은 환희의 절제다. 승리의 송가(頌歌)는 밀림 밖으로 새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나에게 울림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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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박보균 대기자.

나는 디엔비엔푸에서 차를 탔다. 그곳을 찾아갔다. 무엉팡(Muong Phang) 마을. 계곡과 원시림, 산속에 숨어 있다. 무엉은 소수민족 타이(Thai)의 집단 거주지를 뜻한다. 디엔비엔푸에서 35㎞, 1시간30분 거리다. 좁은 2차로 산속 도로. 가파르고 울퉁불퉁하다.

마을에 들어갔다. 길옆에 거대한 석상(石像)이 나온다. “여기서 디엔비엔푸 승리를 선언했다”는 표지판이 있다. 지압의 기념식 장소다. 기념식에 장병 1000명이 집합했다. 보병·포병보급부대, 타이족 짐꾼 여성 대표들이다. 지압은 호찌민의 ‘뀌엣찌엔, 뀌엣탕(결전결승)’ 정신을 되새겼다. 군인들은 그 구호를 외쳤다. 승전 깃발은 펄럭였다.

지금 그곳은 승리 광장이다. 석상은 기념 퍼레이드 장면을 축약했다. 길이 16m, 높이 9.8 m, 폭 6m. 2009년에 세웠다. 엄청난 크기다. 광장 앞쪽이 채워진다. 승리 주역 25명을 새겼다(키 높이 2.7m). 얼굴 표정들은 실감 난다. 헌신과 투지가 넘쳐난다. 자전거, 대포, 차량도 조각했다. 조각상 가운데 지압이 서 있다. 그곳 안내원은 60대 퇴역 군인이다. 그는 외우듯 말한다. “베트남은 전사(戰士)의 역사다. 디엔비엔푸는 승전 신화다. 이곳은 조국 수호를 위한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다.”

왜 이런 은밀한 곳인가. 깊은 산속과 대형 조형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임홍재 전 베트남주재 대사의 분석은 흥미롭다. “베트남 사람들은 침략을 당하면 투쟁의식을 다지고 저항한다. 그와 함께 상대방 강대국의 체면을 지켜주고 증오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배려한다.” 밀림 속 승전 기념은 절제의 격렬한 압축이다. 그것은 베트남의 역사 경험에서 나온 통찰과 지혜다.

국제 관계는 미묘하다. 어제의 적(敵)은 오늘의 친구다. 오늘의 우방은 내일의 적국이다. 베트남의 위쪽 대륙은 중국. 바다에 해양 강국이 있다. 베트남은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쳤다. 그 시절 우방은 중국이다. 하지만 그 후(79년) 중국과 전쟁을 했다. 오늘의 베트남은 프랑스와 친하다. 미국과 힘을 합친다. 남중국해에서 공동으로 중국과 맞선다. 베트남은 전쟁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60년대 중반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맹호·청룡·백마부대의 활약은 돋보였다. 지압의 월맹(북베트남)군과 싸웠다. 베트남의 과거사 접근 자세는 한국과 다르다.

나는 마을 깊숙이 들어갔다. 석상 3㎞ 떨어진 곳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 지압의 지휘본부로 올라가는 입구다. 타이족이 ‘장군(지압)의 숲’으로 부르는 곳. 타이족과 지압의 군대는 ‘물과 고기’ 관계였다.(타이족은 디엔비엔푸 인구의 40%) 산속의 작은 개천, 다리를 지났다. 30분쯤 걸으니 작은 공터다. 오두막 몇 채가 있다. 한 채는 지압의 지휘본부다. 본부 아래는 땅굴(길이 70m, 높이 1.7m, 폭 1.5~3m짜리)이다.

땅굴은 그들에게 전가의 보도(寶刀)다. 60년대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주효했다. 낮 동안 지압은 산 위로 올라갔다. 디엔비엔푸 평야까지 직선거리로 8~10㎞. 프랑스군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군사전략은 예술이다-.” 지압의 전략은 진화한다. “소(小)로 대(大)를 이기고, 소(少)로 다(多)를 누르고, 질(質)로 양(量)을 패배시킨다.”

지휘본부에 지압의 간이침대가 남아 있다. 마른 짚 매트리스다. 지휘관 드카스트리의 욕조(浴槽)가 떠오른다. 디엔비엔푸 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최후 전투의 노획물이다. 마른 짚 매트리스는 욕조와 대비된다.

디엔비엔푸로 돌아오는 길, 800m 산 중턱. 그곳에 또 다른 거대한 조형물(길이 21m, 높이 14, 폭 7m)이 있다. 105㎜ 대포를 끄는 장면이다. 사병 30명이 양쪽에서 밧줄로 끄는 모습이다. 항전의 투혼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베트남의 국가 영혼은 그런 상징물로 단련된다.

[S BOX] 와인 마신 프랑스군, 폐타이어 샌들 신은 베트민군 ‘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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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은 골리앗과 다윗이었다. 보급품의 빈부(貧富) 차이도 뚜렷했다. 디엔비엔푸 전승박물관에서 확인된다. 진열품에 와인병 50개가 있다. 라벨 없는 빈 병이다. 프랑스군 C- 47 다코다 수송기는 와인을 대량 공수했다. 치즈·초콜릿도 함께 진지에 공급했다. 그 옆 전시물은 와인을 마시는 프랑스군 밀랍인형이다. 전세를 비관하는 보초병의 모습이다. 현장 지휘관 드카스트리는 고급 빈티지 와인 4만8000병을 저장했다. 투입된 군인 1명당 3병꼴. 그는 귀족가문 출신이다.

건너편 진열품은 낡은 고무 샌들이다. 검은 빛깔은 바랬다. 베트민군의 전투화다. 그들은 샌들을 신고 평균 300㎞를 행군했다. 베트민군은 가난했다. 가죽 군화는 없었다. 지압 장군도 샌들을 신었다. 드카스트리의 벙커를 점령한 군인도 마찬가지다. 샌들은 자동차의 버려진 타이어로 만들었다. 국가 지도자 호찌민도 샌들을 애용했다. 그는 “산에 오르고 물을 건널 때, 어디서나 편하다”고 했다. 프랑스군 비제아(M.M Bigeard) 중령은 “공깃밥 하나에 샌들을 신고 산을 넘는 그들의 인내심이 우리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았다”고 회고 했다. 폐(廢)타이어 샌들은 관광기념품이다. 하노이의 호찌민 박물관 뒤편에서도 판다,

글·사진=박보균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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