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324㎞ 사패산터널서 수입차 ‘광란의 레이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4·15 세빛. 500마력 달리기 모집합니다.’ 지난 4월 한 수입차 동호회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500마력급 차량들의 레이싱 토너먼트를 위해 4월 15일 서울 세빛둥둥섬에서 사전 모임이 개최된다는 공지였다. 이를 보고 모인 차주는 총 100여 명이었다. 대부분이 람보르기니·포르셰·페라리 등 최고급 외제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의사·회계사 등의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였다.

기사 이미지

지난 5월 사패산터널 폐쇄회로TV(CCTV)에 포착 된 고급 수입차들의 ‘롤링 레이싱’ 장면. 당시 차량 2대가 추돌해 운전자와 동승자 등 3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진 서울경찰청]

일반 도로에서 자동차 경주를 벌이는 것은 불법이다. 사고 위험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운전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서울경찰청은 불법 레이싱에 참가한 혐의(도로교통법 위반)로 회계사 박모(38)씨 등 73명을 검거했다고 14일 밝혔다.

람보르기니·포르셰·페라리 등
속도제한장치 개조해 폭주 경쟁
의사·회계사 등 차주 73명 적발
일부는 사고로 다치자 보험 사기

경찰에 따르면 이들의 레이싱은 ‘시연회’로 시작됐다. ECU(자동차의 엔진·자동변속기 등을 제어하는 장치)와 속도제한장치 등 각종 자동차 구조를 튜닝한 차량을 과시하고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시연회를 거치며 이들은 각자 레이싱 경험과 차의 성능을 기준으로 3~4명씩 짝을 이뤄 대진표를 짰다.

레이싱은 차량 통행이 뜸한 오전 1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사패산터널 중간 지점에 위치한 교통정보안내 전광판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사패산터널은 편도 4차로의 세계 최장 광폭(廣幅) 터널로 동호회원들 사이에선 ‘운동장’이라고 불렸다. 특히 터널 안 교통정보안내판을 기점으로 곡선도로가 끝나고 쭉 뻗은 직선도로가 시작돼 불법 레이싱 경기가 자주 펼쳐지는 장소다.

기사 이미지

시속 324㎞로 폭주하고 있는 차량의 계기판. [사진 서울경찰청]

레이싱은 3~4대의 차량이 줄을 지어 서행하다 약속된 지점에서부터 급가속해 결승점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이른바 ‘롤링’ 방식으로 진행됐다. 레이싱 경험이 없는 참가자들은 달리는 차량 뒤에 바짝 따라붙어 경주 장면을 찍는 ‘관전 차량’에 탑승해 레이싱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운전자들은 순간적으로 시속 320㎞ 이상으로 차량 속도를 끌어올리며 목숨을 건 레이싱을 펼쳤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시속 320㎞는 1초에 90m를 이동하는 속도로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사고가 일어나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자살 행위”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5월 17일엔 레이싱을 벌이던 중 사고가 발생해 BMW 차량을 운전하던 박모(38)씨 등 3명이 쇄골과 어깨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다. 특히 박씨는 레이싱 도중 발생한 교통사고를 일반 사고로 위장해 보험 처리를 시도하다 들통나 사기 혐의로도 입건됐다.


▶관련 기사[사건파일] 별풍선에 목숨 건 BJ…고속도로 광란의 레이싱 생중계하다 덜미



목숨을 건 레이싱에 참가한 73명은 3개월에 걸친 경찰의 추적 수사로 모두 적발됐다. 불법 레이싱을 위한 사전 모임이 열린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잠복수사를 통해 시연회부터 롤링 레이싱까지 모든 범죄 현장을 지켜봤다. 번호판들도 확인해 놓았다. 하지만 이들 73명은 사전에 입을 맞춘 듯 경찰 조사에서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 “차를 빌려 간 친구가 레이싱에 참가했다” “레이싱을 하는 차량들 옆에 있었을 뿐 경주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발뺌하는 식이었다.

박씨 등 레이싱을 주도한 일당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다른 동호회 회원들을 모집해 레이싱을 펼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불법 레이싱 근절을 위해 차량을 압수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