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 농민전쟁 때의 「집강소」 한국 첫 농민들의 권력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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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신용하교수(서울대·사회학)는 최근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특이한 농민통치기관이었던 「농민집강소」의 전모를 밝혔다(『한국학보』제41집).
신교수는 여기서 『집강소는 농민이 원하는 새로운 정치와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한국역사상 최초의 농민을 위한, 농민에 의한, 농민의 권력기관이요 통치기관이었다』고 주장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연패시키고 4월27일 전주를 점령하자 이에 놀란 민비 수구파 정권은 그들의 권력유지에 눈이 먼 나머지 외세에 의존, 청국군2천5백명, 일본군 6천명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빚었다. 이제 「농민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군의 작전여하에 따라 나라가 결딴날 위험에 처하게 됐다. 이들 외국군을 철수시키는 일이 농민군과 관군의 긴급한 공동과제가 됐다.
이에 관군 측은 고종의 위임을 받은 신임 전라관찰사 김학진이, 농민군 측은 전봉준이 중심이 돼 「강화」를 모색케 됐다.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관군에 넘겨주고 해산한다면 김학진 측은 농민들이 원하는 개혁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을 보였다.
농민군 측은 우선 김학진 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탐관오리의 처벌·축출과 농민에 대한 가렴주구 폐지 등 수십개의 폐정개혁 요구조건을 내세워 「전주화약」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그 실행을 지켜보기 위한 「집강소」의 설치를 승인 받았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세우는 과정에서 양반·관리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압도적인 실력으로 전라도 전역의 53개 군현에 이를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집강소의 책임자인 「집강」은 해당 군에서 최고의 통치권력을 장악했다. 조선왕조정부가 임명한 관장(군수)은 오직 이름뿐이었고 만일 실권을 행사하려면 집강과 농민군이 쫓아 내버렸다. 집강은 일종의 농민이 임명한 「수령」인 셈이었다. 전봉준은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 전라우도의 집강소를 직접 지휘하고 김개남을 통해 전라좌도를 간접 지휘했다. 집강소는 전라도일대에서 탐관오리처벌·가렴주구 폐지뿐 아니라 사회신분제 철폐와 지주제도개혁 등 봉건적 구체제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농민통치」를 과감히 단행했다.
1894년 5월부터 11월까지의 약7개월 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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