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교양] '방각본 살인사건 상·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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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나, 황진이''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등 방대한 자료조사와 고증이 돋보이는 역사소설을 잇따라 선보여 관심을 끌었던 김탁환(35.한남대 문예창작과 교수)씨가 새로운 장편소설 '방각본 살인사건'을 출간했다.

새 소설 역시 탄탄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재미와 지식, 두 가지를 동시에 제공하려고 노력해 온 김씨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

또 소설을 통해 이 땅의 소설 전통이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까지 뿌리가 닿아 있었음을 밝히는 이전 작업의 연장이기도 하다. 김씨는 '서러워라…'에서 17세기에 필사본 소설이 광범위하게 유통됐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번 소설에서는 18세기 들어 방각본이 소설의 새로운 생산.유통방식으로 정착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을 증빙하는 여러 자료를 제시했다. 방각은 관청에 의한 관각에 대비되는 민간에 의한 판각 인쇄방식을 말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조 정조 즉위 초기인 18세기 말. 대부분 서얼이었던 신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 결국 중용됐던 북학파의 정치적 득세과정이 사건 현장마다 같은 소설가의 소설책이 남아 있는 기이한 연쇄 살인사건과 얽혀 물고 물린다.

소설의 1인칭 화자인 '나'는 20세에 무과에 급제, 의금부 도사가 된 이명방이다. 아홉 명을 연쇄 살인한 희대의 살인마를 잡는 일은 당연히 이명방의 몫이지만 셜록 홈스의 역할은 따로 있다.

이명방은 발표하는 소설마다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베스트셀러 작가 청운몽으로부터 연쇄살인 자백을 받아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청운몽은 진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청운몽의 능지처참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연쇄살인이 다시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건은 이명방이 교류한 북학파의 멤버 중 신출귀몰한 추리능력을 갖춘 김진이라는 인물에 의해 해결된다.

소설은 진범을 붙잡는 것으로 끝나는 단순 구도가 아니다. 살인범의 석연치 않은 범행 동기 배후에는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론.남인 등 당색에 따라 치열한 암투를 벌인 거대한 '정치적 몸통'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소설 중반까지는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이, 범인이 잡힌 후부터는 연쇄살인 행각의 배후 지원 세력을 추적하는 과정이, 절묘한 퍼즐 맞추기 같은 흥미진진함을 제공하는 소설의 힘이 된다.

김씨는 소설을 통해 두 가지 얘기를 하고 싶었다. 먼저 소설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애정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으면서도,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과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무기로 엄숙한 학문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을 선사하는 저잣거리의 예술, 소설의 미덕이 시종일관 논의된다.

남은 하나는 탑골 원각사지 석탑 아래에서 자주 모였다고 해서 백탑파라 불렸던 박지원.홍대용.박제가.이덕무.백동수 등 북학파들에 대한 적절한 자리매김이다.

명나라가 망했는데도 소중화주의라는 자기 함정에 빠져 당대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청나라의 존재를 무시하는 자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달리 북학파는 철저한 현실적 득실 계산 아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김씨는 북학파 구성원들의 면면, 학문적 업적은 물론 백탑 아래 모임의 모습까지 상상력을 동원해 근사하게 재현해냈다.

역사적 지식과 추리소설을 버무린 소설은 정교하게 짜맞춰진 굵직한 교양물이다. 논리와 주장이 부각되다 보니 작가의 육성은 줄어들었다. 김씨는 백탑파의 이야기를 10부까지 쓸 계획이다. '방각본…'은 1부일 뿐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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