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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는 완벽하게 어항에 갇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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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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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비단잉어인 고이(Koi)는 마법 같은 물고기다. 어항에 넣어두면 기껏해야 엄지손가락 정도밖에 안 자란다. 연못이나 수족관에 넣으면 20㎝ 안팎으로 커진다. 강에 방류하면 1m 넘는 대형 어류가 된다. 주변 환경에 맞춰 변신을 거듭하는 생명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고이만의 비법이다.

OECD의 “정규직 과보호를 깨라”는 경고 새겨야
규제·보호라는 이름의 어항은 고용시장만 교란

활동 영역이 넓어지면 그 영역을 휘어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게 기업이 됐든 사람이 됐든 마찬가지다. 그러려면 어항을 깨야 한다. 시장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데 어항 속에서만 안주하면 강에서 살아남기란 힘겨워진다. 이게 고용시장, 즉 일자리라고 다를까.

지난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부터 또 한 방 얻어맞았다. 맥이 탁 풀린 한국에 정신이 번쩍 들도록 했다. ‘2016 고용전망(OECD Employment Outlook 2016)’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노동개혁을 단행한 스페인·슬로베니아·에스토니아 3개국의 고용 사정을 분석한 내용이 실렸다. 결론은 “정규직 과보호를 깨면 정규직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어항을 걷어내니 견실한 물고기가 많아졌단 얘기다. 에스토니아는 개혁 당시 63.8%이던 고용률이 지난해 71.9%가 됐다. 60%대 초반에서 맴돌고 있는 한국엔 꿈같은 얘기다.

한국도 몇 년 전부터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매년 수십조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하면서도 경제성장 전망치는 낮추기 일쑤였다. 고용 전망도 암울하기만 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던 게 노동개혁을 비롯한 구조개혁이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골든타임이란 용어도 귓전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만큼 썩어가는 물을 벗어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한데 총선을 전후해선 이런 기류가 옅어졌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새누리당에서 홀대를 받았다. 구성원 숫자만 봐도 야당이 10명이고 여당이 6명이다. “정부·여당이 노동개혁을 포기한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와중에 금융권을 비롯한 일부 업종은 상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조선업종은 강력한 노조가 버틴 대기업을 제외하곤 대량 실업 사태가 현실화했다. 같은 정규직인데 중소기업에 다니는 정규직은 대기업 직원이 받는 임금의 49.8%밖에 못 받는다.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최근엔 노동시장을 개혁하자는 말이 쑥 들어갔다.

오히려 ‘관상형 일자리 전선’은 요지부동이다. 대기업 생산현장에선 ‘세습고용’으로 그들만의 어항을 더 두껍게 만들었고, 정치권에선 파견으로 일할 수 있는 업종을 32개로 가둬 은퇴한 사람이 일할 길을 봉쇄했다. 최근엔 야당에서 청년 고용을 늘리겠다며 ‘대기업 청년고용 강제할당제’가 나왔다. 이에 맞서 여당에선 채용한 만큼 기존 직원을 해고할 수 있도록 하자는 ‘해고할당제’가 튀어나왔다. 기업의 채용과 해고 같은 인사권을 정치권이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폭군적 발상이다. 근로자 생사여탈권을 도도히 흐르는 시장이란 강물 대신 정치권의 와류(渦流) 속에 집어넣겠다는 얘기다. 이런 어설픈 개입이 난무하면 결국 시장은 자정능력을 잃게 마련이다. 마치 호주에서 사탕수수 딱정벌레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도입한 두꺼비가 악어를 죽이고 뱀까지 잡아먹으며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생태계를 심각하게 교란한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OECD는 우리보다 고용률이 높은 에스토니아에 지난해 2월 이런 평가와 권고를 했다. “(노동시장 개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견실한 회복을 하고, 실업률이 떨어지며, 경제성장이 가속화하고 있다. 다만 생산성 증대를 위한 개혁에 나서라.” 개혁에 개혁을 더하는, 그래서 고용시장의 물길을 더 도도하게 만드는 작업을 지속하라는 얘기다.

일자리라는 물고기도 흐르는 물에서 자라야 한다. 그래야 몸집도 커지고 번식도 왕성해진다. 그게 경쟁력이고 생존력이다. 보호와 규제라는 이름으로 어항만 자꾸 만들어 가두면 기본적인 생존능력만 떨어뜨릴 뿐이다. 흐르는 물을 따라 유영하고 거친 물을 거슬러 알을 낳는 시장이 건강한 생태계다. 엄지손가락만 한 논리로 1m가 넘는 일자리를 만들 수 있겠는가.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