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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만 있고 가슴 없는 관료에게 미래 맡길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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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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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중앙SUNDAY 플래닝에디터

중국의 과학굴기(科學?起)가 무섭다. 세계 최대의 전파망원경 ‘톈옌(天眼)’을 완공한 데 이어 2020년엔 힉스입자 연구를 위한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를 가동할 계획이다. 30년 후 정상급 과학기술 강국으로 부상하겠다는 그들의 야망이 결코 허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대학의 문을 사실상 닫았다. ‘먹물’ 든 지식인 중 상당수가 오지로 하방(下放)됐다. 그랬던 중국이 어떻게 이런 저력을 갖게 됐을까.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김 교수는 “중국은 혁명할 때도 전쟁할 때도 과학기술 인재 육성을 멈춘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긴 중국의 인구정책을 입안한 주역도 인구통계학자가 아니라 미사일 과학자들이었다. 문화혁명 때 문과 쪽 지식인이 숙청되는 바람에 복잡한 추계를 할 수 있는 인력이 미사일 전문가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시에도 인재 육성한 중국의 과학굴기
갑질하는 관료부터 현장으로 하방하라

김명호 교수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학부로 시난연합대를 꼽는다. 이 대학은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베이징대·칭화대·난카이대가 윈난성 쿤밍으로 피란해 세운 연합대학이다. 시설은 형편없었지만 교수들의 실력과 열정은 최고였다. 화학과 자오중야오 교수는 생계를 위해 비누를 직접 만들어 팔면서도 후일 중국 핵무기 개발의 주역들을 키워 냈다. 토굴 속에 만든 열악한 실험실에서 공부한 양전닝은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지난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투유유도 문화혁명 와중인 69년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에 착수했다. 그녀가 소속된 중의과학원은 10년간 수백 명의 연구원을 투입해 ‘끝이 안 보이는’ 실험에 매진했다. 86세 할머니 투유유는 지금도 연구 중이다.

중국의 과학굴기를 바라보는 한국의 과학계와 대학들은 착잡하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4.29%(2014년)로 세계 최고다. 하지만 혁신적인 연구 성과는 별로 나오지 않고 있다. 과학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공공연구기관 연구원의 정년은 구조조정을 빌미로 65세에서 60~61세로 낮춰졌다. 50년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 때 높은 연봉과 환상적인 연구 환경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과학자들의 헌신은 이제 전설이 됐다. 최근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과학자의 70%는 미국에 남겠다고 한다. 재정적 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좋은 지금, 과학자들의 도전정신은 밑바닥이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장 큰 원인은 막대한 예산을 쥐고 갑질하는 관료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앙SUNDAY가 국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우리 과학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불합리한 관료주의’를 꼽았다.

“한국은 과학 연구의 필요성을 가슴으로 깨달으려 하기보다는 돈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 과학잡지 ‘네이처’의 지적은 정곡을 찔러 뼈아프다. 열정과 철학 없이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한국 관료들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암울해지는 와중에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국민은 개·돼지’ 발언은 참담함과 절망감을 더한다. 그의 말은 한 개인의 망언으로 치부할 수 없다. 문제의 본질은 그 정도의 천박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국가 교육을 설계하는 자리까지 오르는 한심한 인사 시스템이다. 나향욱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리만 있고 가슴은 없는 관료들은 많을 것이다.

시난연합대 학생들이 나중에 중국을 이끈 주역으로 성장한 자양분은 따로 있다. 쿤밍까지 험난한 여정을 걸어가며 중국 민중의 현실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전에 하찮게 봤던 하층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사명감을 깨친 게 과학굴기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 눈앞에 인공지능이 주도할 4차 산업혁명의 쓰나미가 오고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과학기술과 교육을 혁신해야 한다. 공무원들부터 책상에 앉아 갑질할 게 아니라 현장으로 하방해야 한다. 무엇이 절실한지를 관료들이 직접 가슴으로 느껴야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권위주의 정권시대 유물이 된 국민교육헌장에 현재 교육의 목표로 삼아도 좋은 구절이 있다.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자.”

정철근 중앙SUNDAY 플래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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