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의 길을 가다<30>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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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신유한공 일행이 에도 (강호)에 들어간것은 1719년 9월27일이었다.
지금의 점보제트기는 서울∼동경간을 불과 2시간만에 대어준다.
그러나 266년전 신공일행이 에도를 찾을 때는 한양을 떠난지 5개월 보름, 부산을 출발한날부터는 3개월5일이 걸린 긴여행이었다.
일행의 노정을 되짚어 보면 4월11일 한양성 숭례문을 나와 판교∼충주∼조령∼문경∼밀양을 거쳐 5월13일 부산에 도착, 이곳에서 1개월여를 머무르며 먼 여행에 대비한 준비를 갖춘뒤 6월20일 배를 탔다.
일행을 태운 선단은 현해탄을 건너 사스나(좌순나)∼쓰시마(대마도)∼잇끼 (일기) 를 거쳐 8월18일 시모노세끼(하관)에 도착, 여기서 세도나이까이 (나호내해) 로 들어가 가미노세끼(상관)도모노우라 (양포)∼우시마도
(우창)∼무로쓰(실진) 를 거쳐 9월4일 오오사까 (대판) 에 상륙한다. 2개월이 넘게 걸린 뱃길이었다.
오오사까에서 교오또(경도)까지는 요도가와(정천)를 호화선으로 거슬러 울라가 거기서부터 육로로 히꼬네(언량)∼오오가끼(대원)∼나고야 (명고옥)∼시즈오까 (정강) -하꼬네 (상근)를 거쳐 시나가와(품천)에서 1박한후
에도에 입성하게 된다.

<위의갖춘 입성행렬 연도엔 30만의 인파>
시나가와에서 에도로 들어가는 통신사의 행렬은 위의를 갖춘 화려한 것이었다.
막부의 기마 20기의 선도를 받으며 먼저 쓰시마 (대마) 번의 대소관원과 장로그룹이 앞장을 서고 그 뒤에
통신사 일행이 각기 직위에 따라 가마와 말을 타고 나아갔다.
당시의 모습을 『해유록』에서 찾아보자.
『당상역 이하 모두 흑관대를 차려입고 국서를 담은 교자를 배행했다. 군관들은 융복을 입고 화살통을 메었으며 군의를 갖추어 고취하고 풍악을 잡히며 갔다. 3사신은 홍단령을 입었고 나와 상통사·의관도 역시 홍단령을 입고 사신의 뒤를 따랐다. 3서기는 도포와 갓을 차려 입었고 말을 탄 모든 상관·중관·하관들이 차례대로 구슬을 꿰듯이 늘어서서 나아갔다』
행렬의 길이는 5정에 걸쳤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통항일남』에 따르면 일행의 에도 입성코스는 다까나와(고륜)의 오오끼도 (대목호) 를 거쳐 시바구찌바시(지구교)∼교오바시(경교)∼니혼바시(일본교)∼다이덴마바시 (대전마교) ∼간논라이몬(관음뇌문)∼다와라쪼(전원정)를 거쳐 영빈관인 히가시혼간(동목원)사로 들어가는 것으로 돼있었다.
지금 동경의 중심가를 남에서 북으로 관통하는 길이다.
당시 에도 시가지의 모습을 신공은 이렇게 묘사했다.
『길 양쪽의 긴 행랑은 모두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다. 저자에는 정이 있고 정에는 문이 있으며 길거리는 사방으로 반듯하고 곧게 통한다. 새하얀 벽과 장식을 한 담장들은 2층 3층을 이루었고 지붕과 기둥들이 서로 잇닿은 것이 마치 비단을 짠 것 같다.』
지금의 동경은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자동차가 홍수를 사두는 국제도시로 변모했지만 거리 이름만은 그대로
남아 일행이 지나간 길을 더듬게 해주고 있다.
통신사가 입성하는 날은 에도의 주민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전에도 주민의 3분의1이 환영인파에 가담했다고 한 기록은 전하고있다.
1690년대의 에도인구가 80만명이었다니 적어도 30만명이 일행이 지나가는 연도를 메웠다는 얘기가된다. 다시 『해유록』을 보자.
『구경하는 남녀들이 길거리를 메웠으며 쳐다보니 아름다운 집의들보와 중방 사이에는 한치의 비틈도 없이
올망졸망하게 눈들이 내다보고 있는데 옷자락에는 울긋불긋한 꽃무늬가 찬란하고 발과차일이 눈부시다. 대판과 경도에 비교하면 3배나 더 번화하다.』
일행이 사관에 도착하면 공식환영연이 베풀어지고 막부 최고의 행정관인 로오쥬우(노중)가 장군을 대신해서
3사를 예방, 먼 여행의 노고를 위로한다.
이어 쓰시마 번주를 통해 에도 체재중의 일정이 통보된다.
통신사 일행이 에도에 머무는 기간은 보통 25일 전후다. 신공때는 짧은 편이었다.
에도의 영빈관이었던 히가시혼간사는 건물의 크기가 수천간에 이르고 20여개의 말사(말사)를 거느린 대가람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물론 쓰시마번의 대소관원까지 모두 기거할수있을 정도였다.

<20여말사둔 동본원 전화로 기록도 전소>
동경도태동구서천초1정목5번지에 있는 히가시혼간사를 찾았다. 지하철 긴자 (은좌) 선 다와라쪼역에서 걸어서 5분거리 였다. 큰길에서 떨어져 들어앉아있다.
절의 정면에 1백여m 길이의2차선이 뚫리고 길 좌우에 늘어선 점포사이사이에 덕본사·만조사· 선조사등의 간판이 보인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이 점포들이 들어선 곳이 모두 옛날에는 절터였으며 간판을 내건 작은 절들은 그 경내에 있던 말사들이었다한다. 시가지 한구획이 모두 히가시혼간사터 였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은 4천여평 정도로 줄어있었다.
절 정문에는 동경본원사란 간판이 걸려있다.
절의 건물은 본당을 비롯, 모두 시멘트로 지은 것이어서 통신사 일행이 묵었던 옛건물이 아님을 한눈에 알수 있었다.
부속건물이 미용학교·유치원등으로 쓰이고 있어 옛스러움은 고사하고 돈을 벌기위한 사업장같은 인상을 주었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사까모도」(판원목부·65) 스님에게 통신사 얘기를 물으니 금시초문이라고 머리를
젓는다.
절에 있던 기록은 여러차례의 화재로 모두 타버리고 절도 2차대전후 새로 지은 것이라한다.
에도에서 통신사가 치러야하는 최대의 행사는 국서의 전달이다.
신고에 찬 오랜 여행도 결국은 이 한가지 목적을 의한 것이었다고 할수 있다.
국서의 전달은 양국간의 선린우호관계를 확인하는 공식행사이니만큼 의전절차도 까다로왔다. 일본측이 절차를 정해서 미리 통신사측에 알리고 통신사는 이를 검토해서 문제가 있으면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신공 일행이 국서를 전달하기로된 10월1일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일본측이 미리 건네주었어야 할 의전절차를 적은 문서 (의주) 를 당일 아침에야 가지고 왔는데 당시의 외교공용문자인 한자로 된것이 아니고 일본글로 된것이었다.
한자로 옮겨 써야 마땅한데 그일을 맡은「아메노모리·호오슈」(우삼방주)가 앓아누워 번역을 못했다는 것이다.
통신사측은 절차를 분명히 알수 없으므로 가볍게 국서를 전달할수없다고 번역할 사람을 찾았으나 일이 중요한 만큼 모두 뒤를 빼고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신공이 통역관을 대동하고 일본측 관리를 직접 만나 1682년의 의전절차와 같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장군의 거성인에도 성으로 향했다.

<서양문물 도입 시작 신공 까맣게 몰랐다>
숙사인 히가시혼간사에서 장군의 거성까지는 두개의 외성을 거쳐야 했다.
거성으로 향하는 통신사의 행렬도 에도에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당당한 것이었다. 거리에 구경하러 나온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것은 물론이다.
거성에 이르러 군관이하는 말에서 내리고 활통과 찬 칼을 풀고 걸어서 들어갔다. 악대는 문밖에 남았다.
더 나아가 한 문에 이르자 당상역이하도 교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고 다시 문 하나를 통과하자 3사도 교자에서 내렸다.
장군은 일각모쓰고 푸른 도포(?)차림으로 일행을 접견하고 국서를 받았다.
당시의 장군은「도꾸가와·요시무네」(덕천길종)였다. 전임자인「이에쓰꾸」(가계)가 후사가 없어 종친중에서 발탁된 인물이다. 오랜 재야생활로 백성의 사정을 잘 알아 어진 정치를 편 명군으로 일본역사에 기록돼 있다.
그는 외국의 정신문화는 거부하되 기술은 받아 들인다는 방침아래 기독교의 전도나 성서의도입은 금했으나 서양의학등 기술도입은 적극 권장, 난학에서 명치유신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한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의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화혼양재(화혼양재)의 정신적 기틀이 이때 마련됐다고 할수있다.
신공도 해유록에 그 인물에 대해 이렇게 쓰고있다.
『성질이 호탕하고 국량이 크다. 무를 좋아하고 문을 기뻐하지 않으며 검소한것을 높이고 사치한것을 물리쳐 항상 말하기를 일본인들은 반드시 조선문자를 흠모하나 풍기가 각각 다르다. 배워서 능해질 수 없는 것이면 차라리 일본의 글을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했다.
그러나 신공도 이때에 이미 일본이 서양의 과학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시짓고 글잘하는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는데 그쳤다는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하지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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