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謝過)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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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현재 사망자는 464명, 피해등급을 기다리는 희생자 1875명, 잠재적 피해자 227만명(중앙일보 6월 16일자)에 이른다고 한다.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면 이것도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살균제가 판매된 게 1994년,질병관리본부가 살균제를 폐 손상의 위험요인으로 추정한 것이 2011년 8월이니 17년간 억울한 죽음의 행진이 대명천지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탐욕과 직무유기가 낳은 재앙에 대한 사과(apology)는 무책임하고 전략적일 뿐이어서 분통이 터진다.

대한민국의 검사장은 게임업체의 돈 4억 5000만 원으로 그 업체의 주식을 구입하여 100억 원이 넘는 이득을 취했다. 처음에는 ‘자기 돈으로 샀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개인 자금과 장모에게 빌린 돈으로 샀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쥔 공직자가 편법으로 돈까지 거머쥐고 명예마저 얻으려는 심사에서 인지 사과는 시늉만 했다.

사과는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비는 것이다. 사과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동적인 고백, 변명, 무능, 위기관리 전략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소통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다. 원망과 불신으로 틀어진 관계를 그 이전보다 더 튼튼한 관계로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잘못의 원인과 문제점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 재발방지와 개선방안에 대한 명료한 내용, 책임소재에 분명한 조사와 무한책임의 수용을 담아야 한다. 또한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무오류를 주장하는 사이비 교주나 독재자가 아니라면 사과가 불가피한 상황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과의 부재는 분노와 갈등을 자아낸다. 일본 총리 아베는 2013년 5월 12일 항공자위대를 방문하여 731부대에 자부심을 표하는 망동을 저질렀다. 731부대는 일제의 관동군 소속 비밀 생물학전 개발부대로 사람을 쉽게 죽이는 방법을 알려고 인간생체실험을 자행한 괴물이었다. 임산부를 포함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고통을 주면서 죽어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아베는 731이라는 숫자가 적힌 비행기에 올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독일 총리가 나치 친위대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꼴’(미국 넬슨 리포트)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인류의 양식을 모독했다.

진정한 사과는 용서의 공감을 불러온다. 나치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폴란드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빗물로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과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수상은 사과가 어떤 것이며, 사과의 힘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유대인의 한과 폴란드인의 독일에 대한 의구심을 덜고, 통일 독일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는 계기를 일구었다. 지난 2015년 일제의 고문으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피와 땀이 어린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였다. 순국한 165명의 선열을 기리는 추모비에 ‘일본의 전 총리로서,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고문이나 가혹한 처사로 목숨까지 잃은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드린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복수와 그에 따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악순환은 효과적인 사과가 부재하기 때문에 초래되었다...사과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종류의 갈등이라도 완화할 수 있는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 (존 케이도, ’한 마디 사과가 백 마디 설득을 이긴다). 진정한 사과는 소통에 이르는 길이다.

김정기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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