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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에서 얻은,경험을 녹여 만든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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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8면

(오른쪽 아래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영광-니스, 말라카립스(5가지 향신료로 맛을 낸 돼지갈비구이), K 프라운(시리얼을 이용한 새우요리). 모두 처음 보는 맛깔스러운 창작요리들이다. 어디에도 없다.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익숙한 환경,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낯선 곳에서 겪는 경험은 발전을 위한 자극이 되고, 성숙의 자양분이 된다. 때로는 여행을 통해 아예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옛날 유럽의 귀족들은 자제들이 성장하면 일부러 여행을 시켰다. 이른바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부르던 교육 여행이었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폭 넓은 사고와 소양을 갖추는 계기로 삼았다.


옛날에는 이런 여행이 돈 있는 귀족이나 가능했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나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좋은 세상이다). 그래서 인생을 좀 더 진지하고 의미 있게 살아보려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기 위해,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목표를 세우기 위해 스스로 용감하게 여행 길에 나서고 있다. 단순하게 놀고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하고, 느끼고, 배우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으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된 셰프를 만났다. 김태윤(37)셰프다. 대학교에서는 사학을 전공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진로를 정하지 않고 1년 반 동안의 긴 여행을 떠났다. 중국 칭다오로 배를 타고 건너가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파키스탄·이란·터키까지 아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동유럽을 거쳐 런던으로 갔다. 이후 인도의 캘커타로 가서 봉사활동도 하고, 동남아를 거쳐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 힘든 여행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 대답이 바로 요리였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있어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조리사 자격증까지 딴 내력이 있던 참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요리사로서 제대로 공부를 하기 위한 또 다른 긴 ‘여행’을 시작했다. 먼저 일본에 있는 요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양식 요리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일본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요리뿐 아니라 일본의 장인 정신, 서비스 정신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 열심히 공부를 한 덕분에 학교 졸업 무렵에 두바이에 있는 최고의 호텔인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에 요리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다양한 요리를 접하고 공부했다. 틈만 나면 유럽을 포함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현지 요리에 대한 경험도 많이 쌓았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는 한식을 두루 공부했다. 한식에 어울리는 전통주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쳐서 마침내 자신만의 레스토랑 ‘7pm’ 을 오픈 한 것이 2011년 10월이었다. 2015년에는 사직공원 옆에 ‘주반(酒飯)’이라는 요리주점을 또 오픈했다.

▶주반: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 118. 전화 02-3210-3737 오래된 골목 길에 숨어 있듯이 자리잡고 있어서 잘 찾아가야 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 6시부터 영업을 한다. 좌석이 많지 않아 미리 전화로 확인하는 것이 좋다. ‘영광-니스’ 1만5000원. 다양한 전통주도 준비되어 있다.

‘주반’은 편한 사람들과 한 잔 할 때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아지트 같은 곳이다. 우연히 들렀다가 독특하고 새로운 요리에 반해 단골이 됐다. 큐민·정향·카드뮴·팔각·강황·계피 등등 많은 종류의 향신료를 사용하고, 남플라·넉맘·앤초비·어간장 등 여러 나라의 발효소스로 맛을 낸 창작 요리들이 아주 새롭고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영광-니스’라는 이름의 메뉴를 보자. ‘먹물 라바쉬 위에 올린 굴비 브란다드’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브란다드(Brandade)’는 염장한 대구살에 올리브오일·마늘·감자와 우유를 곁들여 무스로 만든 프랑스 요리다. 프로방스 지방에서 주로 먹는다. 여기에서는 염장 대구 대신 영광 굴비를 이용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지역에서 먹는 플랫브레드인 ‘라바쉬(Lavash)’를 곁들였다.


간단해 보이지만 복잡한 과정을 통해 요리된 무스가 부드러우면서도 짭짤한 풍미를 주면서 바삭한 라바쉬와 씹히는 것이 어디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독특한 맛을 경험하게 해 준다. 여기에 맛이 진한 에일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 궁합이 금상첨화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재료와 여러 나라의 요리 방법, 다양한 향신료를 결합한 다국적 창작 요리가 풍성하게 준비돼 있어서 갈 때마다 새 요리를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러 나라를 복합적으로 여행하는 느낌이다. 김 셰프가 그동안 배운 요리 실력에, 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접했던 다양한 요리에 대한 경험까지 녹여 결합한 결과물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여행을 수없이 했다. 나이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매번 여행을 할 때면 뭔가 새롭게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여행은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자 선생님이다. 마주치는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도 여행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선다. 또 모른다. 어느 순간에 인생이 바뀔지도. ●


주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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