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생각한다.|김상기교수 <미 남 일리노이 대>중앙일보 창간20주년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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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중앙일보의 창간 스무돌을 충심으로 축하한다. 이 기쁜 날에 21세기의 도전을 생각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듯하다. 중앙일보가 창간 40주년을 맞이할 때 세계는 어떠한 문제를 안고있을까?
한갓 인위적인 시간의 매듭에서 큰 뜻을 찾는 것은 물론 부질없는 일이다. 21세기가 온다해서 세상이 몰라보게 좋아질 턱이 없고, 어떤 부문이 발전하면 그 부작용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발전의 부정적 국면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면 파국이 올 수도 있다. 21세기를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에 대한 치열한 비판과 반성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20세기는 말할 것도 없이 서구문명이 세계를 정복, 세계시장을 통한 지배와 착취의 체제를 완성시킨 시대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근대적 주권국가와 자본주의 경제가 인류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 과정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에 있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비극의 길이었고 전쟁과 내란에 줄잡아 1억이 넘는 목숨이 비명에 쓰러진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 죽음과 굶주림을 퍼뜨리고 있다.

<유토피아는 환상>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와 통어가 엄청나게 큰 규모로 되고 효율적으로 되면서 이에 조직적으로 항거한 것은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주의 운동은 세계체제를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하여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으로 함몰해 가는 면마저 보이고있다.
여기서 사회주의의 패배와 종언을 말하는 경솔한 사람들을 문제삼을 필요가 없겠으나 21세기에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출현한다고 믿는 것도 유토피아의 환상이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동서의 경쟁이 격화되고 남북의 착취와 피착취관계의 국가들이 무상하게 적과 동지를 바꿔가면서 눈앞의 이익을 위하여 아귀다툼하는 것이 21세기의 모습이라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이 극히 상식적인 예상은 3가지의 상식적인 도전을 생각하게 한다. 첫째로 고도로 전자화된 기술산업사회가 당장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올 것인가. 새로운 생산양식이 생활전체에 폭넓고 깊은 변화를 일으킬 것은 의심할 바 없으나 오늘의 세계체제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바람직한 결과만을 가지고 온다고 하는 것은 정신나간 사람의 소리로 들린다.
자동화·전자화된 사회는 잉여인간을 양산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미 미국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불황으로 생겨나는 실업자가 아닌 룸펜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인 4천만이 기능적 문맹이다. 이것은 미국교육의 질이 내려가서 생긴 현상이 아니라 생산양식의 전문화가 멀쩡한 사람들을 쓸모 없는 인간퇴물로 일거에 전락시키고 있음을 뜻한다.
노동조합이 급속히 힘을 잃어가고 노동자들은 언제 컴퓨터와 로보트에게 빼앗길지 모르는 직장에 매달려 전전긍긍하고 있다. 미국에 안정된 직장이란 옛말이 되었다. 이들은 내일 닥칠지 모르는 실직의 공포에 떨면서 잉여인간들에게는 잔인하다. 룸펜에게 지급하는 정부의 보조를 줄이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을 일하는 형편에 있으니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인도·인도네시아 등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게되면 우리는 노동집약적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고도기술화의 생산체제로 이행하는 것이 생사를 가름하는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될 때 선진국들이 쌓아올린 복지사회의 기반을 우리는 이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잉여인간의 양산이라는 파국을 맞게 되지 않을까.
다른 어느 후진국보다 우리 나라가 더 훌륭하게 분배의 평등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대적 빈곤이 더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나라가 더 잘 살게 될 때까지 더 참고 열심히 일하라는 주장인데, 오늘의 노고와 희생에 대한 보상을, 후에 받게 된다는 보장이 없는 한 설득력이 없는 얘기다. 죽도록 일해서 고도기술사회를 건설하고 나니 로보트가 직장을 빼앗아 가더라는 식이 되지 않으려면 빈부의 양극화가 악화되기 전에 평등사회의 기반을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부의 균점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회만이 발전에 따르는 고통과 희생의 부담을 평형의 원칙에 따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파괴 더 심각>
둘째로 자연파괴의 문제가 있다. 광활한 국토에 풍요한 자원을 가진 미국에서 기업의 이윤을 높이기 위하여 애써 이룩한 환경보호정책을 정부가 완화하고 있다. 소련도 공해문제가 날로 악화되고있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바이칼 호수마저 오염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영국과 독일의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는 북구의 숲을 죽이고 있다. 자연파괴는 특정 공해산업의 조업의 결과만이 아니고 오늘의 생산활동 전체의 총괄적 결과인 것이다.
자연통어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해도 대국적으로 되고있어 막대한 비용과 노동력의 투입이 없는 한 자연환경 보호는 엄두도 내기 힘들게 되어 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력이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인간과 자연이 공해로부터 받는 장기적 영향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고 회복이 불가능한 유전형질의 변화, 생물계의 사멸 등을 알고 있는 경우에조차 우리는 생산활동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21세기의 세계는 오늘에 비하여 얼마나 더 오염되어 있을까. 공해문제에 관한 한 나는 비관론자다.
21세기의 세 번째 도전은 내셔널리즘이다. 19세기의 사상가들은 순진하게도 20세기는 내셔널리즘을 극복한 인터내셔널리즘의 세계를 이룩하리라 내다봤었다. 그들의 낙천적 역사관이 부럽다. 20세기의 세계는 내셔널리즘으로 인해서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21세기에 피를 덜 흘리기를 바랄 수는 있겠으나 내셔널리즘이 수그러질 희망은 없다.

<절대선의 함정>
서구의 국가주의, 아시아의 반제국·반식민주의, 아프리카의 흑인의 투쟁, 중동의 신정주의, 중남미의 포퓰리스트 운동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개념에 포함된다. 여기서 물론 서구의 국가주의가 제국주의로 전개되어 다른 민족주의의 항쟁을 불러온 기폭제가 되었다.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세계를 진감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반제국 민족주의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들이 하는 일들을 보면 이들이 그 많은 피를 흘리고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미를 가지게 한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하고 미국마저 물리친 월남이 캄보디아에 쳐들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월남이 옛날의 종주국이 하던 약소민족의 착취와 노략질을 흉내내고 있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이란의 「호메이니」옹은 어떠한가. 사탄의 나라 미·소·불을 배격하고 이라크를 비롯한 배교도들을 응징하는 성전을 수행하고 있다면서 쿠르드족의 민족자결을 위한 운동을 탄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니카라과의 혁명정부는 왜 인디언들을 학살했나.
선진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제3세계의 피압박민족의 반제국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면서 제3세계의 혁명적 민족주의에 큰 희망과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하여 도덕적 분노를 가지고 나아가서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지게 되는 것은 심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도덕적 우월감이 그대로 참된 도덕적 우월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악행을 배워 새로운 가해자로 둔갑하는 경우 그의 도덕적 우월감은 가장 가공할 허위의식으로 떨어질 위협을 항상 가지고 있다.
반제국·반식민의 민족조의가 제국주의에 대항하므로 절대악에 대항하는 절대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자기기만이다. 성공적 반제국 민족주의는 새로운 제국주의의 첫 단계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직하다.
외세에 대항하여 민족주체성을 살려야 하는 동시에 민족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을 위하여 민족주의 자체를 넘어서는 자기비판과 투쟁을 게을리 하면 21세기는 20세기에 못지 않게 추악한 세상이 될 것이다.
민족평화통일의 사명을 지고있는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하나의 종교가 되고 있다. 이것은 위대한 가능성과 크나큰 도덕적 타락의 함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 민족주체성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회의도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분위기가 우리사회에 넓고 깊게 퍼져가는 것을 나는 우려한다.
전에는 매판지식인들이 혹세무민하더니 요사이는 민족주의자들이 신성불가침의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억압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전에 비하여 진보한 것은 반가우나 여전히 답답한 느낌은 어쩔 수 없다. 21세기에 보다 크고 넓은 의식과 행동의 차원을 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창간 스무돌의 기쁜 날을 맞아 덕담대신 우울한 얘기를 늘어놓고 말았다. 이것은 필자의 직업상 불가피한 일이니 독자여러분의 양해 있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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