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야구노트] 두산 ‘화수분 야구’ 비결은, 34년 뿌리 깊은 2군 시스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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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지난 2008년 한 야구용품 업체 사장이 서울 잠실구장에 물건을 한 보따리 내려놨다. 두산의 한 젊은 선수가 달려나와 그 짐을 다 들고 갔다. 그러더니 선배들 라커에 물건들을 하나하나 챙겨 넣었다. 그 선수는 그해 스무 살 나이에 프로야구 최연소 타격왕(0.357)에 오른 김현수(28·현 볼티모어)였다. 이 사장은 “야구를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두산 선수들은 칼같이 선후배들을 챙긴다. 뭘 해도 똘똘 뭉쳐 있다”고 귀띔했다. 함께 잠실구장을 쓰는 LG 선수들이 자기 물건만 쏙 빼가는 모습과 대비됐다고 한다.

원년 우승하자마자 첫 2군 팀 창단
사장·단장은 13년째 장기플랜 호흡
팀 헌신 선수 중용, 조직 문화도 한 몫

두산은 13일 현재 승률 0.712(42승1무17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챔피언이기에 올해도 우승후보로 꼽히기는 했지만 시즌 초부터 이렇게 독주할 줄은 몰랐다. 4번타자 김현수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했으나 그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선수가 여럿 등장했고, 김현수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그들은 함께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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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일(左), 김재환(右)

두산의 폭발력은 강한 타선에서 나온다. 팀 타율 1위(0.301)인데다, 넓은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면서도 홈런 공동 2위(67개)다. 유망주 김재환(28)이 지명타자를 꿰차면서 타율 0.349, 홈런 17개(2위)를 기록 중이고, 1루수 오재일(30)은 부상과 싸우면서도 타율 0.359에 홈런 8개를 때려냈다. 김현수가 비운 좌익수 자리엔 수비력이 뛰어난 박건우(26·타율 0.333, 6홈런)가 뛰고 있다.

20대 후반~30대 초반에 주전으로 도약한 이들의 공통점은 간절함이다. 오재일은 “어렵게 주전을 차지했다. 이 자리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김재환은 “오랫동안 1·2군을 오가면서 힘들었고, 주전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태어난 쌍둥이 딸을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준비했다”고 했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탄생한 스타가 아니다. 지금도 경기도 이천의 퓨처스(2군) 훈련장에서 젊은 선수들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1군 선수가 돼서도 악착같다.

두산의 전신 OB는 1982년 챔피언에 오르자마자 프로야구 최초로 2군 팀과 2군 경기장을 만들었다. 우승의 기쁨에 취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한 건 그들의 오랜 전통이다. 두산 스카우트 팀은 유망주의 5년 후를 예측해 뽑고, 2군 훈련→1군 경험→군입대→1군 도약으로 이어지는 계획을 세운다. 두산은 항상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내기 때문에 코치들이 조급해 하지 않는다. 중·장기 플랜을 갖고 선수를 육성한다. 감독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선수, 팀을 위해 몸을 던지는 선수를 중용한다. 지난달 노경은(32)의 항명사태 때 두산은 단호하게 징계를 내렸고, 그를 롯데로 트레이드했다.

이런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건 김승영 사장과 김태룡 단장이다. 91년부터 야구단 실무를 경험한 김 사장과 야구선수 출신 김태룡 단장은 2004년부터 13년째 야구단 경영을 함께 책임지고 있다.

사장·단장 이하 실무진이 각자의 파트에서 전문성을 발휘해서 만든 게 ‘화수분 야구’다. 뿌리가 탄탄하기에 열매 몇 개를 잃어도 또 다른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 지난 12년 동안 두산이 아홉 차례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팀 전력이 아니라 팀 문화가 만든 결과다.

많은 구단들이 선수들에게 근성과 화합을 요구한다. 또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고 주문을 왼다. 안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소리치는 것이다. 그러나 두산 구단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행동한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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