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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마시멜로는 지금 먹겠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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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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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부서에서 비상연락망을 만들었다. “보호자 연락처를 적어 내세요.”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열 일 제치고 달려와 줄 사람이 누구인가. 결혼 2년, 주말부부라 친정과 지방을 오가며 두 집 살림 중이다. 지방에서 일하는 남편이 열 일까지 두고 뛰어올 것 같진(올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010-XXXX-XXXX, 부(父)’. 후배가 다음 칸에 적다 말고 물었다. “선배, 결혼하셨잖아요?” “너도 결혼 해 봐.”

부모의 사랑은 묻고 따지는 법이 없다. 철이 들면서 부모님의 조언을 새겨듣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수십 년 쌓아온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 틀릴 리 있겠나. 가족 저녁자리, 다 큰 딸은 또 고민을 늘어놨다. 일은 힘들고, 앞으로 잘해낼 자신도 없다는 뻔한 30대 직장인의 이야기. 별말 없이 소주잔을 비우시던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힘들어도 잘 참아내야지. 더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마시멜로 실험이라고 있다. 아이들에게 마시멜로를 주고, 당장 먹지 않고 기다리면 더 맛있는 걸 주겠다고 약속한다. 먹지 않고 참아낸 아이들이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에 비해 대학 입학 성적이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았다. 현재의 즐거움을 미룰 줄 아는 능력이 바람직한 삶을 꾸려가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다. 많은 이의 삶이 보여주듯 이 말은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의 경제전문 웡크 블로그(Wonkblog)에 미국 로체스터대학에서 진행된 새로운 실험이 하나 소개됐다. 판단력과 절제력은 비슷하지만 경제적 환경이 다른 아이들에게 마시멜로(M&M 초콜릿)를 줬더니 부유한 아이들은 참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먹어 치우더란다. 처한 상황에 따라 똑똑한 선택은 다를 수 있다는 거다. 1960년부터 수십 년간 이어온 ‘마시멜로 정설’에 대한 작은 도발이다.

나는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구의역 추모에 나선 사람들을 보며 마시멜로를 떠올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위로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이들은 나중에 더 많이 갖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만족을 뒤로 미루지 않고 눈앞에 놓인 마시멜로를 기꺼이 먹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성장 시대, 이들은 어쩌면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여전히 실패자들의 논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뉴욕타임스 유명 칼럼리스트는 힐러리 클린턴의 비호감도가 상승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목표에 집중하는 클린턴이 기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썼다. 성공의 상징인 힐러리도 그럴진대 우리가 마시멜로를 애써 남겨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김 혜 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