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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웃는다고 웃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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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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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

불가근불가원. ‘원만한 직장생활을 위한 요령 백서’가 있다면 1장에 나올 격언이다. 직장 동료와 너무 가까워지면 사생활과 업무가 뒤섞여 구설에 오르기 십상인데, 그렇다고 또 감정을 배제하고 업무에 필요한 말만 하면 “저 친구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일본의 문예 평론가 후쿠다 가즈야는 자신의 책에서 “아부를 제대로 해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도 감수성과 상상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힘든 일”이라고 했다. 아첨꾼들의 출세가 단순히 아첨 덕이라기보다 아부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재능 덕분에 두각을 나타낸다는 해석이다.

아무튼 사회성도 노력이고 노동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감정노동자다. 감정관리 활동이 직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를 감정노동자로 부른다고 하는데, 고객 응대 업무가 없는 평범한 회사원도 직무의 20% 정도는 감정노동이 아닐까. 월급쟁이 기자도 취재 업무 외 감정노동이 꽤 된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기사가 ‘킬’될 때, 선배가 쓸데없이 고친 문장 때문에 나 혼자 부장에게 욕을 먹을 때 의젓한 표정의 가면으로 속내를 감춘다. 집에 들어가면 “저녁은 먹었니? 너 좋아하는 반찬 해놨어”라는 엄마 말도 대꾸하기가 싫고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무표정한 얼굴로 씻고 잠이 든다.

점심이 딱 한 시간의 칼 같은 직장이라면 감정노동의 강도가 더 세진다. 대기업에 다니는 A 대리, 점심시간마다 신경이 곤두서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성토한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몰려 3분만 늦게 복귀해도 상사가 시계와 A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주고 5분 늦는 날엔 “너무 늦게 온 것 아니냐”고 대놓고 지적을 받는다고 한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1200명 정도에게 물었더니 86.2%가 ‘현재 직장에서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가장 많이 숨긴 감정은 분노. 섭섭함과 우울감이 뒤를 잇는다. 일주일에 35시간(제조업 평균)밖에 일을 안 하는 독일에서도 노동자 4000만 명 가운데 10% 정도인 410만 명이 정신적·감정적 고통을 경험한다는데, 주 6일을 밥 먹듯 하는 우리나라야 오죽하랴.

1년 전만 해도 욱하고 화가 치밀면 친한 동료들과 모여 “아오, 확 그냥, 내가 여차하면 그만둔다”고 허장성세를 부렸다. 사실 결혼, 전세대출, 아기 침대가 머리에 떠돌아 그만두지는 못하지만 말로 쓴 사표라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충분했다. 그런데 불황은 깊어만 가고 회사 바깥은 더 춥더라는 흉흉한 이야기만 들려오니 이제 그런 허세도 사치다.

출근길에 탄 택시에서 이런 안내 스티커를 봤다. “손님과 저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 다니시는 길이 있으면 편안히 말씀해주세요.” 이런 마음이라면 일터에서 조금 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