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네 딸만 네 딸, 내 딸은 내 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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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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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

‘○○○씨가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경찰에 따르면 ○씨는 여직원의 가슴과 다리를 만지는가 하면 뒤에서 껴안거나 강제로 입맞춤한 것으로 확인됐다. ○씨는 경찰 조사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도 “상대가 불쾌한 걸 알았다면 진작 사과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다 하다 샘플 기사까지 만들었다.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성추행 때문이다. 가해자를 회사 간부나 군대 상사·선생님으로, 피해자는 여학생이나 지나가던 여성으로 바꿔도 된다. 장소는 식당·노래방·술집 등 다양하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변명 과정에서 ‘기억이 안 난다’가 항상 기본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내 딸(또는 손녀) 같아서 그랬다”는 말도 자주 덧붙인다.

이번에는 한 유명한 전직 전문경영인이 새로 연 카페에서 처음 보는 여종업원에게 어깨를 주무르게 하고 뒤에서 껴안는 모습이 폐쇄회로TV(CCTV)에 찍혔다고 한다. 가해자의 해명은 앞서 교과서에 나오는 정석대로다. “당사자가 불편해할 줄 몰랐다”며 “격려까지 해 줬다”는 것이다. “손녀 같아 귀여워서 툭 찔렀다”던 전직 국회의장, “격려 차원에서 툭 쳤다”던 전직 청와대 대변인의 말과 행동을 ‘복사+붙여넣기’한 꼴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은 흔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유명하지 않아 뉴스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사무실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지인은 회식 자리에서 느닷없이 블루스를 청하는 상사에게 얼떨결에 응했다가 그날 퇴근하고 나서야 불쾌감과 후회감이 몰려왔단다. 모두의 축하 속에 대기업에 합격했던 다른 지인은 메신저로 잠자리를 요구하는 상사 때문에 퇴사 후 작은 사무실로 옮겼다. 이런 사건을 ‘사회지도층의 추태’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힘이 빠지는 건 앞서 소개한 저 샘플 기사가 앞으로도 쭉 쓰일 것 같아서다. 우리 주변에서 직급이 높을수록 “나는 문제가 전혀 없다”며 한 귀로 흘려보내는 분이 많다. 이번 사건에서 놀라 뛰쳐나간 여종업원을 다시 끌고 온 카페 사장처럼 ‘그게 무슨 대수냐’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에선 이성에 대한 폄하·비하 글이 넘쳐난다.

부끄럽지만 나는 페미니즘도, 여성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도 잘 모른다. 얼마 전 회사의 성희롱 예방 교육시간에 스마트폰만 만지작댔음을 고백한다. 친하다는 이유로 여자 동기들이 불쾌해할 수 있는 질문과 말을 서슴없이 던질 때도 있었다. 그런 나도 곧 딸아이의 아빠가 된다. 배 속에 있는 아이 얼굴은 하루빨리 보고 싶지만 아이에게 “너를 딸 같다고, 손녀 같다고 하는 남자들을 피해라”고 가르쳐야 할 날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예비아빠로서 자꾸 페미니즘으로 기울어 가는 느낌이다.

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