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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아재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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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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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사회부문 기자

엊그제 베트남 출장을 떠나면서 회사 선배에게 보고했다. “내일부터 베트남에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는 대뜸 “베트남에 가면 박쥐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카바이러스 때문에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박쥐는 무슨 얘기? 돌아온 대답은 “베트남엔 배트맨, 배트걸이 많아서….” 나는 선배의 이런 ‘아재개그’에 물들어 가고 있다.

바야흐로 ‘아재들의 시대’가 열린 것일까. 인터넷에서 아재개그를 찾아보면 ‘미꾸라지보다 작은 건 미꾸미디엄, 미꾸스몰’ 같은 검색 결과가 쏟아져 나온다. 썰렁하고 촌스러우면서도 친근하고 은근히 웃긴 이런 개그에 사람들은 ‘아재’라는 수식어를 붙여 줬다. TV 속 연예인들도 쉴 새 없이 아재개그를 주고받는다.

요즘에는 주로 30·40대 배우들이 드라마 남자 주인공을 맡는 데다 여자 주인공과 나이 차가 열 살 이상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보니 ‘아재파탈’이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악녀라는 뜻의 ‘팜므 파탈(Femme fatale)’을 ‘아재’와 합쳤다. 이 배우들은 드라마 속에서 상대를 배려하고 인내하면서도 여유 있는 유머를 구사하는 품격을 보여준다. 철없는 연하남이나 상처 많은 재벌 2세 캐릭터가 지겨워진 여성 시청자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는 분석이 나온다.

언제부터 아재가 이렇게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나. 사실 아재는 남자가 듣고 싶지 않은 말에 가깝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을 했을 때 새내기 후배들이 나를 ‘오빠’가 아닌 ‘아저씨’ ‘아재’로 불러 서러웠다. 다른 복학생 친구들도 같은 아픔을 겪었다. 유부남이 되어 직장 생활 하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후배들과 친해지려고 아재개그를 날리면 ‘저 사람 왜 저러나’ 하는 시선을 받기 일쑤다. 오죽하면 장미여관이라는 밴드가 ‘오빠라고 불러다오’라는 노래에서 절규했을까. “나 아직 오빠야. 날씬하진 않지만 깜찍하고 귀엽기만 하잖아. 왜 나를 괴롭히나. 제발 아저씨라 부르지 마.”

사실 아재는 억울하다. 본인이 원해 아재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미여관 노랫말처럼 ‘배 나오고 숱 없고 머리 사이즈가 큰’ 외모의 문제도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빠의 감성을 잃어 버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멋진 아저씨’가 되는 방법을 어디서도 배워 보지 못했다. 어디서나 환영받는 매너와 매력의 소유자가 되고 싶지만 그게 어떤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도 멋진 아저씨가 될 조그마한 여지마저 앗아간다.

30대에 접어들고 애 아빠가 된 나도 결국 피할 수 없이 ‘아재의 길’에 들어섰다. 20대 시절 멋진 오빠가 되어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아재파탈이 되는 것으로 풀어 보려 한다. 그 첫 단계로 여유와 해학 넘치는 아재개그부터 몇 가지 외워 봐야겠다.

정종훈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