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를 와닥닥 해제껴라"|남북한 단절40년…말도 안통했다|본사 금창태 편집국장대리 평양취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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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40년의 단절」은 국토의 분단뿐만 아니라 언어의 단절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우리는 평양에 머무르는 3박4일동안 곳곳에서 처음듣는 어휘와 생소한 표현에 부닥뜨려 곤경을 겪었다. 북한은 평양말을 표준어로 삼고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함경도말과 평안도말이 섞인 새로운 「톤」과 「옥타브」가 대중의 회화와 공식석상에까지 사용되고 있었다. 발음과 억양외에도 새로만들어 쓰는 말, 그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쓰는 어휘는 이루 다 예를 들수없을만큼 많았다.
입북첫날 버스편으로 개성에 도착하여 평양행 열차를 바꿔타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화장실이 어디요?』 안내원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한참 설명을 했더니 그제서야 『아, 위생실 말입네까』하며 안내를 했다.
철도연변 시골길을 트랙터한대가 덜컹거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북한에서 트랙터도 생산합니까』 『………』 또 말이 통하지 않았다. 차창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때서야 『「뜨락또르」 말이군요』 하고 알았다는 표정이다.
『「뜨락또르」 생산은 급속히 장성했디요. 북한에서는「뜨락또르」 댓수가 백정보당 평지대에서는 7대, 중간지대와 산간지대에서는 6대에 이르렀디요. 앞으로 근로자들을 발동하여 적어도 10∼12대에 이르게할 계획이디요.』
「급속히 장성」, 「근로자들을 발동」… 모두가 한참 생각한 다음에야 알듯한 표현들이었다. 「뜨락또르」는 말할것도없이 소련말이다. 소련의 영향을 받은 말 가운데는 「티제」(테마), 「삐오네르」 (소년단원), 「꼼무나」 (공동집단), 「깜빠니아」(집중사업)등 수없이 많았다. 마치 우리말에 외래어가 넘치는것과 별차이 없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두음법칙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로동신문」「리발」「립체사진」「녀성동지」「념원」등과같이 「ㄹ」, 「ㄴ」이 낱말의 첫머리에 예사로 쓰이고 있었다. 이러한 발음은 평안도사투리의 특징으로 평양표준말에서 그대로 쓰고 있었다.
평양에 묵는동안 아침마다 호텔방에는 「로동신문」, 「민주조선」, 「평양신문」등 세가지 조간이 배달되었다.
8월28일자 「로동신문」에는 『가을걷이 준비를 철저히 하자』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가을 걷이는 짧은기간에 와닥닥 해제껴야한다』, 『가을 걷이 준비를 빈틈없이 잘 세우고 섬멸전의 방법으로 한가지 한가지씩 바싹 다그쳐 모가 나게 해제꺼야한다』, 『강냉이 수확도 적기가 오면 와닥닥 달라붙어 해제낄것을 요구한다』… 문체와 문장구성이 거칠고 생소하다.
낱말의 뜻이 너무 달라 의사소통이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가을철에 비가 오고 대기온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영양물질이 분해되어 천알당무게를 떨꾼다』, 『논벼의 호흡이 왕성하게 진행되는 경우에 천알당무게는 시간이 가면 가는것만큼 낮아진다』….
「천알당」이란 단어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다. 「낱알」쯤으로 해석하고 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평양산원」을 선전하는 「팸플릿」을 보았다.
『대동강기슭에 녀성들을 위한 평양산원이 거연히 일떠섰다』 『…현대적 기술기재들이 그쯘히 마련되어있다.』
「그쯘히」, 「일떠섰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일떠섰다」는 북한 선전유인물에서 흔하게 볼수있었다.
『새로 일떠선 창광거리에 건설공사가 한창…』 『갓 일떠선 공장에서 근로 일꾼들이…』 『웅장하게 일떠선 창광원에 봉사일꾼들이 모여들어…』 『평양을 현대적도시로 일떠세우기 위하여….』
「일떠선」은 아마도 「새로 설치된」「창설」「건설」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존칭어도 희한하게 쓰고 있었다.
『미소를 담으신채 말씀을 이으시였다』 『종합 치료대 앞에 이르시였을 때였다』 『건물 높이도 알맞춤하고 자리도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김일성이 어느병원을 둘러보는 장면을 쓴 기사였다. 김일성에 관해서는 기사에서도 존칭어를 쓰는것이 우스꽝스러웠을 뿐아니라 우리 같으면 「하셨다」 「하시었다」로 끝낼 존칭어를 『하시였다』로 쓰고있었다.
「되었다」도 「되였다」로 표기했다. 『수의축산대 창립 30돐기념회가 26일 현지에서 진행되였다』고 쏜 기사를 읽었다.
북한에는 외래어나 한자어를 우리말로 고치고 「자」자가 든 이름은 일본식이라해서 다 고쳤다고 했다.
「순자」 「경자」란 여자이름은 모두 「순희」「경희」등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고향방문단이 북한을 찾아가도 옛고향의 지명이나 두고온 일가친척의 이름조차 찾을수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여성의 옷차림가운데 「원피스」는 「동일옷」 또는 「외동옷」으로 통했고 「투피스」는 「동강옷」이라 했다. 「발레」는 「예술체조」, 「오페라」는 「음악무용」으로 불렀다.
모란봉경기장에서 우리대표단이 중도에서 참관거부를 했던 전쟁놀이 「매스게임」은 그들의 「스케줄」표에는 「학생무용체조」라고 적혀있었다.
학생들이 무용과 체조를 하는 줄만 알고 참석했던 우리대표단이 『이게 무용체조냐』며 따지자 그들은 『그럼 뭐라고 해야하느냐』며 도리어 삿대질을 했다.
40년의 단절이 같은 말을 놓고도 서로가 이렇듯 염청난 의식과 개념의 괴리를 느끼게 만든 것이다. 「고향」이란 말을 들을때 우리는 꽃피고 새우는 어릴적 마을을 생각한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는 김일성의 생가를 꾸며놓은 만경대가 곧 그들의 고향으로 받아들여진다. 「백두산」이란 말을 들을때 우리는 천지를 연상하고 민족의 영산으로 단군신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있어서 백두산은 혁명의 밀영을 뜻한다.
「어버이」도 마찬가지다. 북한주민들에게 어버이는 김일성하나뿐이다.
음식이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류관만찬「메뉴」에 「얼음보숭이」란것이 있었다. 나중에 보니「아이스크림」이었다. 「보신탕」은 「단고기」라했다. 「닭튀김」은 「닭유찐」, 「채소」는 「남새」, 「케이크」는 「똘뜨」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밖에도 냉장고는 「냉동기」로, 수리센터는「편의점」으로, 「드라이 크리닝」은 「화학세탁」으로, 「매점」은 「매대」로 통했다.
『강아지』란 제목의 글이 있었다. 『강아지가 망망, 오리보고 망망, 나비보고 망망』으로 돼있었다. 남쪽은 강아지짖는 소리가 「멍멍」인데 북은 「망망」으로 쓰고 있었다.
북한은 1949년부터 한글만 쓰기 시작해 기자의 안내를 맡았던 안내원(49·직업총동맹중앙위원회조직부직원)에게 한문으로된 명함을 주었으나 읽지 못해 한글로 토를 달아 주어야했다.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 현상은 이제 경우에 따라서는 통역이 필요한 만큼 심화돼있음을 느꼈다.
이런 면에서도 남북간의 교류와 방문이 하루 빨리 본격화돼 한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이 회복되도록 노력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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