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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만원의 각자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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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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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422만원. 구의역에서 숨진 19세 청년 김군이 소속된 용역업체(은성PSD)가 지난해 서울메트로 출신 직원 38명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월급액이다. 이 회사가 맡았던 지하철 스크린도어 관리는 ‘조건부 민간위탁 용역 사업’이라 불렸다. 여기에서 ‘조건부’는 서울메트로의 인력 감축 계획에 따라 밖으로 내몰린 직원들을 채용하며 일정 수준의 임금을 지급한다는 뜻이다.

용역 계약 문서에서 이들은 전적자(轉籍者)라고 표현된다. 원적이 다른 특수 신분이라는 의미다. 외주업체의 고용을 활용한 서울메트로의 구조조정은 2008년에 시작됐는데 2012년에 행정안전부(현 행정자치부)는 지방공기업 경영 실적 평가에서 서울메트로에 최고 등급(가)을 줬다.

144만6000원. 은성PSD 급여지급명세서에 적혀 있는 김군의 5월 급여액이다. 기본급 130만원에 연장근로수당, 휴일근무수당 등이 더해진 총액 160만원에서 세금과 각종 납부금으로 15만4000원이 공제됐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월 발표한 전국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은 148만원이었다. 이에 비춰 보면 김군은 매우 평균적인 비정규직이었다.

422만원.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중위소득(4인 가족 기준)이다. 전국 모든 가구를 소득 순서대로 줄을 세웠을 때 정중앙에 있는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서울메트로 전적자 급여와 액수가 똑같은 것은 우연이다.

‘궂은일은 컵라면 먹는 비정규직에게 맡긴 채 별로 하는 일 없이 많은 월급을 챙긴’ 몹쓸 사람들이 돼 있는 전적자들은 지금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공기업 효율화라는 미명 아래 정년퇴직을 몇 년 남겨둔 상태에서 젊음을 바쳐 일해온 직장에서 쫓겨나 20% 이상 줄어든 월급을 받았고, 저임금 비정규직은 어느 조직에나 있는 것이라고. 게다가 나의 소득은 딱 사회적 평균 수준이었으니 판검사 출신 변호사나 ‘주식 대박’의 검사장처럼 큰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라고. 틀린 말이라고 하기 어렵다.

전적자들은 50대 후반이다. 김군 또래나 그보다 몇 살 많은 자녀가 있을 나이다. 422만원 중 상당 부분을 자녀의 학비나 스펙 쌓기 비용으로 썼을 것이다. 자신처럼 구조조정 우선순위에 드는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또 김군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도록 하려고 남다른 교육열을 보인 이도 꽤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처럼 눈 딱 감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로 나선 죄가 있다. 내 자식만 챙긴 이 땅의 많은 사람에게도 같은 죄가 있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