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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전 '피카소의 예술과 사랑' 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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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에바·올가·마리 테레즈·도라 마르·프랑스와즈 질로·자클린느 로크….

스페인이 낳은 큰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사랑에 빠졌던 여성들을 꼽다 보면 “그림은 나의 일기장의 한 페이지”라는 그의 말이 절로 이해된다. 아흔 두살로 눈을 감기까지 그가 남긴 수만 점 작품들에는 대체로 이들 매혹적인 여성이 시기별로 등장한다.

삶의 에너지가 넘쳤던 피카소는 자신의 실제 생활을 거울처럼 비춘 혈기왕성하고 당당한 남성과 그와 관능적인 사랑을 나누는 에로스의 여신을 즐겨 그렸다.

하지만 천하의 피카소도 유한한 목숨을 지닌 인간이었다. 말년에 이르러 그가 색정적인 취향에 기운 적나라한 성애 묘사에 몰두한 걸 보면 늙음과 죽음 앞에서 한탄하는 화가의 안타까운 안간힘이 아닐까 넘겨짚게 된다.

9월 14일까지 서울 순화동 호암갤러리에서 열리는 '피카소의 예술과 사랑'은 피카소가 남긴 판화 2백5점 속에서 욕망에 불탔던 그의 일생을 더듬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리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상 볼라르의 이름을 딴 1937년판'볼라르 판화집'과 68년 여든 일곱살 노년기에 단 몇 달만에 소나기처럼 3백47점을 제작한'347 판화집'에서 고루 나온 전시작품은 30년 간격을 둔 피카소의 화풍 변화를 살필 수 있게 한다.

'볼라르 판화집'이 오십대 중반 최전성기에 다다른 피카소의 성공을 증언하고 있다면, '347 판화집'은 기력이 소진해 이제 어쩔 수 없는 한 남자의 실패를 보여준다.

기획을 맡은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예술은 정숙하지 않은 것"이란 피카소의 한마디를 좇아 스페인 방카하재단의 소장품 가운데 '성' '누드' '화가와 모델' 등 10개 주제에 맞는 판화를 골랐다.

느끼할 정도로 장식하고 꽉 채운 화면,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완벽한 선을 떠오르게 하는 선묘는 영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스페인 남자가 일군 부와 명성이 결국 화면의 요설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하게 한다.

피카소는 혼란스러운 20세기를 그림으로 비꼰 시대의 독설가였고, 인간적인 어리석음을 성에 풀어 수집한 기록가였다. 고급스러운 춘화에 가까운 '라파엘과 라 포르나리나' 연작에서 몸이 맘대로 되지 않는 노인 피카소는 강렬한 에로스의 무대를 꾸며놓고 교황이며 추기경을 훔쳐보는 구경꾼으로 그려넣어 조롱한다.

관음증의 세계에서 그들은 모두 하나였고, 거기에서 관람객도 벗어날 수 없다.

피카소는 서커스의 광대들을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커다란 서커스였고, 인간은 구슬픈 트럼펫 소리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어릿광대였다. 피카소는 "결국 마지막에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란 걸 알았던 위대한 어릿광대였다.

전시 기간 매일 오후 12시와 3시에 피카소의 삶을 다룬 영상물을 상영하며, 오전 11시와 오후 2시.4시(영어는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전시설명이 이어진다.

'피카소…'전 입장권으로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9월 14일까지 열리는 '오노 요코'전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어른 4천원, 학생 2천원(10명 이상 단체는 50% 할인). 02-771-238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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