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좀비 연기 때 눈물이 다 납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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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에서 이른바 ‘우물 신(scene)’은 많은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로 꼽힌다. 주인공 종구(곽도원)와 그의 친구들이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처단하러 산에 올랐다가 우물 앞에서 좀비로 변한 주민 박춘배와 맞닥뜨려 격투를 벌인다. 박춘배는 머리에 쟁기가 꽂힌 채 종구 일행을 공격한다.

박춘배 역 스타덤 오른 길창규씨
33년째 지역 극단 지킨 연극인
“폐지 모아 고물상에 팔며 연습”

기괴하면서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 장면은 러닝타임 2시간40분 중 5분 남짓했지만 포털 사이트에 ‘곡성 박춘배 누구’ 등이 자동검색어로 오르는 등 큰 화제가 됐다.

좀비 박춘배를 연기한 배우 길창규(54·사진)씨를 29일 충북 청주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그는 종구 친구 역할 중 하나로 오디션을 봤지만, 그의 연기를 본 나홍진 감독이 박춘배 역의 오디션을 제안해 최종 발탁됐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촬영 3개월 전부터 매주 2~3번씩 현대무용가 박재인 선생에게서 안무 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살(煞)을 맞고 몸을 비트는 연기를 했던 아역배우 김환희양과 함께 연습했다”며 “어려운 연기였지만 즐겁게 공부했다”고 말했다.

우물 신은 8일에 걸쳐 완성됐다. 좀비 분장을 한 채 잠들고 일어나 다음날 촬영을 이어가기도 했다. “좀비의 움직임·표정을 표현하는 게 어려워 육체적·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나중엔 눈물까지 나더군요. 어려운 부분 하나하나를 감독과 세세하게 의논했어요.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악령에 잡혀서 조종당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감이 잡혔습니다. 마지막 촬영을 끝냈을 땐 주변 배우들과 스태프가 달려와 안아줬어요.”

‘곡성’으로 세간에 이름을 알렸지만 그는 올해로 33년째 지역 극단을 지킨 잔뼈 굵은 연극인이다.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청주 극단 ‘무심천 가무단’에 들어갔다. 학창시절 발표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부끄럼이 많았던 성격을 극복하려 선택한 길이었다. 단역으로 시작해 조연과 주연을 거치면서 연극은 그의 삶의 일부가 됐다. ‘살짜기 옵서예’ ‘수전노’ 등 90여 개 작품에 출연했고, 청주연극협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연극인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올해로 고3·고1이 된 딸과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날이 수없이 많았다. “연극판 수입으로는 두 아이의 학비를 대기도 빠듯했어요. 낮엔 연습하고 밤엔 건설 현장 등에서 일하거나 폐지를 모아서 고물상에 팔았죠. 그래도 늘 응원해준 가족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달 3~22일 청주에서 열리는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를 위해 작품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무대에 서기만을 간절히 바라던 초심을 잃지 않는 게 목표예요. 작든 크든 무대는 제 삶의 현장이니까 겸손하게 걸어나갈 겁니다. 나중에 후배들에게 본이 되는 선배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청주=글·사진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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