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친구] "한국의 장맛처럼 속이 깊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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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햇살은 나의 창을 밝게 비추고 반쯤 눈을 떴을 때 그대 미소가 나를 반겨요'. 요즘 기분이 좋을 때 나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면서 읊조리는 인기 가수 장나라씨의 히트곡 '스위트 드림'의 노랫말이다.

난 張씨의 열렬한 팬이다. 그의 모습에선 때묻지 않은 자연미가 물씬 느껴진다. 또 노래를 들을 때마다 풍부한 감성에 흠뻑 빠지곤 한다.

지난 4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張씨의 3기 팬클럽 창단식에 참석,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스무살도 채 안된 대부분의 행사 참가자들은 50대 중반의 외국인이 나타나자 다들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다.

당시 행사 주최 측이 나를 단상으로 초대한 덕분에 서툰 한국말로 관중에게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張씨 팬들이 풍선으로 박수를 치며 나를 열렬히 환영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그렇게 우렁찬 박수는 처음 받아본 것 같다.

난 한국 음식에도 푹 빠져 있다. 내가 즐겨먹는 음식은 갈비.더덕구이.빈대떡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스위스 치즈 '레클렛'을 먹을 때엔 양파.피클 외에도 반드시 김치를 곁들여 먹고 있다.

김치는 다른 음식의 맛을 돋우는 데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들라면 번데기다. 역한 냄새 때문이다.

한국의 모든 것이 나에게 신기하고, 정겹고, 그리고 유쾌하다. 이처럼 내가 한국에 푹 빠질 수 있도록 항상 곁에서 애정을 갖고 조언해준 분이 있다. 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는 장성현(張晟鉉.64) 장앤어소시에이츠 사장이다.

난 張사장의 탁월한 경륜과 학식, 두터운 인맥, 그리고 스위스에 대한 애정에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유학한 뒤 현지에서 스위스 제약회사인 산도스에 채용됐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10년간 산도스 한국지사 대표로 활동했다. 95년부터 10년 넘게 '한국.스위스 친선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양국 간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각종 활동을 벌였다.

또 97년부터 지난 5월까지 스위스.한국 기업인들의 모임인 '스위스.한국 경제협의회(SKBC)' 회장을 지냈다.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가장 열심히 뛰어온 민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느낀 것은 주한 스위스 대사로 부임했던 2000년 8월이다. 당시만 해도 낯선 나라에서, 게다가 유교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고 들은 한국에서 내가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張사장은 서울 성북동 자신의 집에서 나의 취임을 축하하는 가든파티를 열었다. 그는 각국 대사들 뿐 아니라 한국의 기업인.국회의원 등 1백여명을 초대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파티에서 받은 명함들을 보면서 흐뭇한 기분이 들었던 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파티가 한국 외교가에서 나의 데뷔전이었고, 그 파티 덕분에 한국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또 張사장이 열어준 파티를 계기로 나는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가 파티에 사물놀이패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물놀이는 내가 처음 접해본 한국의 전통문화였다. 타악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와 공연단의 율동이 힘차고 이국적이었다.

그때 느낀 감동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국 사찰을 방문해 밤을 지새며 불교문화에 심취하는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난 지금까지 그의 집을 열번도 넘게 방문했고, 그를 대사관 관저로 수차례 초대했다. 그를 누구보다 편안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더해지는 한국의 장(醬)처럼 그는 속이 깊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를 찾는다.

정리=하재식 기자<angelha@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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