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자리|17명 째… 39년 동안의 영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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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립서울대학교총장. 학원상황이 어수선한 가운데 박봉식 박사가 22일 17번째 그 자리에B앉았다. 지난46년 개교이후 39년 동안 16명이 그 자리를 거쳐갔다.
최고의 지성을 대표하며 상아탑의 상징으로 통하는 서울대총장. 그 39년사는 바로 한국의 대학사 그것이다. 지성을 대표하는 영예와 함께 시대상황을 갈등으로 체험해온 그 역사는 더 나아가 건국이후 우리역사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엔 총장은 장수했고, 격동기엔 단명했다. 초창기는 대학 내의 문제로 씨름했으나 60년대 중반부터는 정부의 입김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정치적 변혁을 가져온 문제들이 항상 대학에서 표출됐고, 정부는 대학을 대표하는 총장,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대총장을 통해 이를 진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서울대총장은 여느 대학의 총장보다 가장 민감하게, 제기되는 문제와 이에 대응하는 상황을 체험해야 했고, 이 때문에 최고지성의 대표라는 영예의 자리를 갈등으로 보내기도 했다.

<초창기>
초대 총장은 미국인인 「해리·B·앤스태드」박사. 유일한 외국인총장이다.
46년8월22일 공포된 미군정법령 제102호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 에 의해 당시 군목이던 「앤스태드」 박사가 총장에 취임한 것. 이와 함께 교무처장에 「호레이스·N·언더우드」씨가 임명되는 등 많은 미국인이 학교 집행부를 맡았다.
결국 학생들의 국대안 반대시위로 「앤스태드」 박사는 1년2개월만에 물러났고, 61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47년9월 당시 이사회는 문교부장관고문이던 이춘호씨 총장으로 선임했다.
이 총장도 문리대와 법대교수들간의 연구실 사용에 휘말려 7개월만에 물러나야 했고, 당시 사대학장으로 도산과 흥사단운동을 했던 장리욱 박사가 3대 총장에 취임, 보직교수가 총장에 오른 첫 케이스가 됐으나 장 박사 역시 연구실 분쟁을 해결하지 못해 8개월만에 물러났다.
그후 중동학교의 설립자이며 독립운동가인 최규동 선생이 4대 총장으로 옹립됐다. 최 총장은 6·25때 납북, 50년10월6일 평양형무소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흥기>
총장다운 최초의 총장은 5대 최규남 박사. 4년 9개월 재임했다.
최 총장은 52년4월26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국사학자 이병환씨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6·25중에 취임한 최 총장은 종전 후 서울대재건의 임무를 맡아 당시 미국에서 제공되는 원조물자의 많은 부문을 공대· 농대· 의대에 집중 투자해 자연과학분야의 교육기틀을 세운 공로자다.
최 총장이 문교부장관으로 발탁됨에 따라 후임총장으로 취임한 6대 윤일선 박사는 최초로 교수회의에서 뽑힌 부총장출신 총장으로 지금까지 서울대총장 중 최장수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재임기간은 5년3개월.
당시 윤 총장은 투표인 교수2백명중 1백사명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 때문에 윤 총장은 재임기간 중 4·19와 5·16등 정치적 변혁기를 맞았으면서도 총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까지의 총장임기는 6년.
결국 윤 총장까지는 학생소요 등으로 총장이 책임을 지는 일은 없었던 셈.
윤 총장이 원자력원장으로 전임되고 후임에 권중휘 박사가 취임. 권 총장은 4년 임기 중 2년6개월만에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6·3학생 데모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것이 학생들의 시위로 인한 문책인사의 첫 케이스였다.
8대 총장으로 부임한 신태환 박사는 불과 1년2개월의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총장의 권한강화에 공헌했다.
신 총장은 『교권이 행정권에 못지 않은데 젊은 장관이 이래라 저래라 하며 대학총장을 자기 부하처럼 명령만 한다』며 권오병 문교부장관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하게 나타내고는 사표를 냈다.
신 총장은 특히 『제적은 학생에 있어서는 사형선고인데 웅지를 품고 대학문을 두드린 학생들에게 내 손으로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다. 교수와 학생의 목을 자르면서 총장직을 지키고 싶지 않다』 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광화문의 책방으로 달려간 일화를 갖고 있다.
법대학장으로 있다 9대 총장이 된 유기천 박사는 취임직후 학생처벌을 주도, 교수들간에는 「극우 강경파」 또는「돈키호테」로 불렸다. 유총장은 법대학장 재직 중 데모학생처벌 제1호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유총장은 취임직후 라이벌 관계였던 황산덕 법대교수를 파면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황교수와 유총장은 같은 형법학자이면서도 황교수는 경성제대출신으로 고시파였으며 철저한 불교신자였던 반면 유총장은 일본동경제대출신으로 고시반대파인데다가 기독교신자로 함께 법대에 재직하면서도 학생처벌문제 등에 마찰을 빚기도 했다.
두 사람은 특히 58년8∼10월「신태양」 「사상계」등을 통해 서로 인신공격에 가까운 논쟁을 벌였다. 특히 황교수가 유총장의 박사학위논문을 공박하며 『미국사람의 눈에 한국을 아프리카토인의 문화수준인 야만민족으로 보여주고 박사가 된 지식은 있으나 무지한 사람』이라고 악평을 하자, 유박사는 황씨를 겨냥해 『입신출세에 급급한 수재형은 경멸받아야할 우리의 적』 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던 것.
입시열기가 한창이던 66년2월 유총장은 보도진들에게 서울대 합격자명단을 자정에 발표하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기다리다 지친 기자들이 새벽에 공관으로 쳐들어가자 사냥개를 풀어놓고는 『자정 넘어 남의 집에 들어오면 개가 물어도 괜찮다』 고 궤변을 늘어놨다.
총장취임 후 교내에서 불온삐라 한 장이 발견되자 유총장은 『교내에 빨갱이가 있다』며 민간인 출입을 일체 금지시키기도 했다.
유 총장은 한일협정비준반대데모가 계속되자 『협박전화가 계속 걸려와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며 66년10월 호신용 벨기에 제 브로닝6연발권총의 휴대허가를 경찰에 신청, 화제가 됐고 결국 1년3개월만에 총장직을 물러나야 했다.
결국 유총장은 퇴임 후 『현정권이 총통제 장기집권을 꾀한다』 는 등의 발언으로 내란선동혐의로 입건되기도 했고 장기결근을 이유로 파면 당한 뒤 재판에서 이겨 파면처분은 취소됐으나 파면기간의 봉급청구소송은 패소하는 등의 기행이 많았다.
유총장은 현재 미국에서 미국인부인 (71) 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발전기>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며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는 말과 함께 취임한 10대 최문환 총장은 전임인 유기천 총장과는 달리 조용한 인품의 소유자.
이 때문에 3선개헌반대· 문리대 3과통·폐합파동으로 재임중 학생소요가 계속됐지만 4년임기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11대 한심석 총장은 서울대출신으로는 첫 총장이었고 서울대역사상 유일하게 한번의 임기를 채우고 연임된 케이스.
그러나 연임된 지 불과 6개월만에 긴급조치반대 데모의 와중에서 사표를 내야했다.
정치학박사인 13대 윤천주 총장은 강한 쇼맨십과 정열적인 근무의욕으로 교수로보다는 행정가로 알려졌었다.
윤총장은 공화당 사무총장· 문교부장관· 국회위원을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 정치인에 가까왔고 권력의 핵심부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부총장에서 14대 총장으로 취임한 고병익 총장은 유신말기의 어려운 싯점에 총장직을 맡았다가 10·26사태와 5·17등을 겪는 과정에서 1년만에 물러났다.
15대 권이혁 총장은 의대학장· 보건대학원장· 서울대병원장을 거친 학교행정통으로 5·17로 계엄군이 장악한 가운데 부임했었다.
권총장은 83년10월 문교부장관으로 옮기면서 이임사에서 『매일 간부회의의 결론은 「오늘도 비나왔으면 좋겠다」였다』 고 데모에 시달리는 서울대총장의 심경을 토로했었다.
지난20일 4년 임기를 2년3개월 이상 남겨두고 미문화원농성학생징계와 관련, 정부와의 이견으로 퇴진한 이현재 총장은 자율화에 따른 학생들의 「열기」 와 정부의 「주문」사이에서 누구보다도 고민하며 1년9개월을 지냈다.
84년10월24일 학생들의 시험거부사태를 이유로 대학에 경찰병력이 다시 들어오자「어려운 상황」 이란 말만 되풀이했고, 지난18일 단과대학에서 결정된 학생징계내용이 문교부로부터 「미온걱」이란 불만을 사자 『학생징계에서 교수들의 결정은 최우선권을 갖는다』며, 『총장이 마음대로 이를 번복하면 교수의 학생지도는 사실상 어려워진다』는 입장을 밝힌 뒤 총장직을 떠났다.

<이덕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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