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2>|제82화 출판의 길40년(65)수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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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47년에 설립된 수선사는 그 조직과 창설의 뜻이 특이했다. 즉 수선사의 사장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권위있는 외과전문인 백병원의 백인제원장, 부사장에 당시 우리나라 대기업 중 하나인 천일고무의 김모사장, 상무는 인망이 높은 변호사 백붕제씨, 그리고 당시 이름있는 의사 여섯사람(김기호·공병우·김하등·이성봉·신례용·김희규)이 주주로 구성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의사등 9인이 힘을 모았는데 자기들은 그동안 의술을 통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니 그 재산으로 문화사업을 해보겠다는 정신으로 시작한 것이 이 수선사 창설동기입니다』
이말은 수선사를 창설할 때 관개했던 백낙순씨 (64·현 육법사회장) 의 증언이다.
백씨의 말과 같이 인술로 번돈을 해방조국의 문화사업을 위하여 합작투자 했었다는 것은 그 독행을 높이 사야할 일화인 것이다. 회사조직도 부사장엔 경영의 일인자인 천일 고무사장을, 상무에는 백변호사를 각각 안배하였다는 것은 출판기업의 건전한 운영을 여러모로 꾀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편집진은 고문에 김억·김도태·김흥제제씨이고, 편집주간엔 계용묵·허윤석 양씨가 맡았다. 이런 인물 구성으로 보아 황무지와 같은 해방출판계에 거는 일반의 기대는 자못 컸었다.
우리 을유문화사의 발족시기보다는 수선사의 발족이 약1년10개월 뒤인 셈이다. 다만 수선과 을유의 조직 인맥이 수선은 주로 서북 출신이고, 우리 을유는 서울중심의 기호출신이란 점이 달랐다.
그리고 우리 을유사무실은 종로에 있었는데 수선은 명동에 있었다.
우리나라 신문학의 개척자를 많이 배출한 서북지방의 지연으로였는지 수선사의 개성은 문학도서출판에서 그것이 두드러졌었다.
즉 염상섭저『만세전』, 박종화저『청춘승리』, 김동인저『발가락이 닮았다』, 주요섭저 『사랑손님과 어머니』, 최정희저 『천맥』, 정비석저『제신제』, 계용묵저『별을 헨다』, 김동리저『황토기』가 창사후 1년사이에 출판되는 활기와 정진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수선사의 이와같은 출판역량에 대해서는 동업 출판계가 한결같이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또한 수선사가 제일 먼저 기획했던 책은 백철저 『조선신문학사조사』 와 그 속편 두권이다. 당시 수선사는 이 책 광고에서 용지는 마카오 갱지를 사용했다고 하고 정가는 7백원으로 하였었다. 앞에 적은 8종의 소설책이 정가가 3백원내외인데 비하면 그 2배나 되는 고가의 책이었다.
그리고 이땅에 신문학이 싹터30여년, 이인직의 신소설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색있는 문장 하나하나 발췌하여 사실·자연·퇴폐주의의 주류를 선명히 했다고 광고문은 적고있다.
또한 수선사 도서목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으로는『서재필박사자서전』이 있다.
이 책은 개화기혁명운동의 선구자 홍영식·김옥균·박영효·서재필 제씨중 유일한 생존자인 서박사 80생애의 자유민주주의의 투쟁사를 1개월여에 걸쳐 직접 구술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 사학가 김도태씨 (전 서울여상교장·작고)가 사실을 근거로 문답하며 받아쓴 산 기록으로서 참으로 귀중한 자료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밖에 수선사는 윤석중 동화선집, 「에루잘렘」·김종흡역 『철학개론』, 고정왕저『조선민요연구』등 소위 말하는 종합출판사로 발전하는 도상에 6·25사변을 당하여 사장 백인제씨, 상무 백붕제씨 형제가 함께 남북되어 일시에 수선사는 처참한 비운에 휩싸이고, 그들 7인의 의사들이 출판문화를 위해 봉사하려던 초지는 끝내 꺾이고 말았다.
그로부터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74년4월에 창작과 비평사란 출판사가 등록되었다.
이 출판사의 실질적 경영인은 다름 아닌 서울대학교의 백낙청 교수인데 이가 바로 수선사의 상무직을 맡았던 백붕제 변호사의 영식이다. 수선사 창설당시의 장한 뜻을 그 2세가 이어가는 것만 같아서 반갑기 그지없는 심정이다. 다음번엔 교과서 출판계이야기로 옮길 것이다. 정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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