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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맨이 된 식스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탕! 탕!” 1984년 1월18일 레바논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총성과 함께 학장 말콤 H. 커는 그대로 쓰러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이슬라믹 지하드’의 소행이었다. 커 학장은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말콤 H. 커는 현재 미국프로농구(NBA)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인 스티브 커(51·미국)의 아버지다.

골든스테이트 감독 스티브 커
이슬람 단체에 아버지 피살 당해
강도에 부친 잃은 조던과 동병상련
90년대 불스 제국 3연속 우승 일궈
910경기 중 30경기 선발 뛴 식스맨
작년 감독 데뷔 첫 해에 깜짝 우승
올 최다승 신기록, 2연속 정상 도전

미국 애리조나대 신입생이었던 아들 스티브 커는 아버지가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비탄에 빠졌다.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테러를 강력 규탄할 만큼 이 사건은 국제적 이슈가 됐다.

커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농구에 매진했다. 4년 뒤 커는 경기 도중 상대팀 관중들로부터 끔찍한 야유를 들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베이루트로 돌아가라” “너희 아버지는 어디 갔니?”. 커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커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코트에 섰다. 그리고는 전반에만 3점슛 6개를 성공시켰다. 동료들은 얼음과도 같은 심장을 가졌다는 뜻에서 커를 “아이스” 라고 불렀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이겨낸 커는 NBA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커 감독은 골든스테이트를 이끌고 2015-16시즌 NBA 역대 정규리그 한 시즌 최다승(73승9패) 신기록을 세웠다. 선수 시절이던 1995-96 시즌 자신이 시카고 불스에서 달성했던 72승 기록을 깨뜨렸다.

커는 선수 시절 시카고 불스에서 3회(1996·97·98),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2회(1999·2003)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2014~15 시즌 골든스테이트 감독에 부임하자마자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2시즌 연속 우승에 도전 중이다. 골든스테이트는 19일 오클라호마시티와의 서부콘퍼런스 결승(7전4승제) 2차전에서 118-91로 대승을 거두고 1승1패를 기록했다.

선수 시절 키 1m90cm에 몸무게 79㎏으로 깡말랐던 커는 포인트 가드로 뛰었지만 리딩 능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1988년 NBA 드래프트 50순위로 피닉스 선즈에 입단한 뒤 대부분 식스맨(후보 선수)으로 뛰었다. NBA 16시즌 동안 910경기에 나섰지만 선발 출장은 30경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1990년대 시카고 불스에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53)와 함께 뛰던 백인 슈터 커는 고비 때 마다 한방을 터뜨렸다. 1997년 6월14일 유타 재즈와의 NBA 파이널 6차전에선 86-86으로 맞섰던 종료 5초 전 위닝샷을 터뜨렸다. NBA 역대 3점슛 성공률 1위(45.4%) 기록은 여전히 커가 보유하고 있다.

시카고 불스 시절 커는 조던과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화가 난 조던이 주먹을 날렸고, 커의 눈은 시퍼렇게 멍들었다. 며칠이 지난 뒤 조던은 커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조던과 커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1993년 강도 사고로 부친을 잃었던 조던은 커의 아버지가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한 뒤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커는 승부처에서는 차가웠지만, 평소에는 누구보다 따뜻한 남자다. 아버지 말콤 H. 커의 숙원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대인의 화합이었다. 커는 선친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편견없이 대하려고 노력한다.

필 잭슨 시카고 불스 전 감독은 “악동 데니스 로드맨(54)을 가장 따뜻하게 감싸준 선수가 바로 커였다”고 회상했다. 골든스테이트를 이끌고 있는 커 감독은 ‘제2의 로드맨’ 드레이먼드 그린(26)도 보듬어 안았다. 다혈질의 그린이 올 시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커 감독은 “우리팀에는 순한 양밖에 없다. 그린이 열정을 불어넣는다”며 그린을 감쌌다. 커 감독은 골든스테이트 ‘3점슛을 쏘는 조던’ 스테판 커리(28)를 끊임없이 칭찬하면서 그를 코트에서 춤추게 만들었다.

선수 시절 커는 ‘명장’ 필 잭슨 감독(NBA 11회 우승)과 그렉 포포비치 샌안토니오 감독(NBA 5회 우승)의 지도를 받았다. 잭슨 감독은 트라이앵글 오펜스(삼각 공격), 포포비치 감독은 시스템 농구를 펼쳤다. 감독으로 성장한 커는 두 스승의 장점을 합쳐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커 감독은 ‘스몰볼(small ball)’ 농구를 구사한다. 5명의 선수 전원이 달리면서 내·외곽포를 펑펑 터뜨린다. 커리(1m91cm), 클레이 톰슨(2m1), 그린(2m1cm) 등이 번갈아 득점을 올린다. 손대범 KBS N스포츠 해설위원은 “커 감독의 농구철학은 ‘공유’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팀워크를 중요하게 여긴 계기가 된 것 같다. 골든스테이트 선수들은 늘 움직이면서 볼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커 감독은 우승 반지 6개를 모았다. 선수로서 5개, 감독으로서 1개. 이제 커 감독은 7번째 반지를 낄 준비를 하고 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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