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작심 3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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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이가 없어 "새해 아침부터 무슨 술이냐"고 쏘아붙였다. 그런데 남편은 "내 깊은 뜻도 모르고 잔소리냐"며 화를 냈다. 지난해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몸이 상했으니 올해는 양주에 얼음을 채워 마시며 작은 양으로 술맛만 느껴보겠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해 콧소리를 섞어가며 "여보, 난 당신을 믿어요"라고 애교를 부렸다. 우쭐해진 남편은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양주잔을 기울였다.

몇 시간 뒤 손님이 오셨다. 남편은 손님에게 약주나 한잔 하자고 권했고 그는 반갑게 응했다. 졸지에 나는 과메기 안주에 술상을 차려야 했다. 두 사람은 과메기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어쩌고 저쩌고 소주를 여러 병 비웠다. 아이들과 나는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으며 지켜봤다.

저녁때는 갑자기 매운맛이 입에 당겨 닭발을 시켜 먹기로 했다. 순순히 동의한 남편이 닭발을 시키는데 전화기에 대고 생맥주도 주문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또 술이냐"고 소리쳤다. 남편은 지지 않고 매운 닭발에는 생맥주가 최고라면서 조금만 마시겠다고 우겨댔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래, 마셔라 마셔. 일 년 마실 술 오늘 다 마셔라. 그러다 죽으면 시집 한번 더 가서 팔자 좀 고쳐보자'.

새해 첫날 아침에 결심이나 하지 말든가. 아이들 앞에서 잘난 척은 다 해놓고…. 하루도 못 참고 아침에는 양주, 점심에는 소주, 저녁에는 맥주까지 아주 골고루 한다. 정말 할 말이 없다. 작심삼일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작심 3시간은 남편이 처음이다. 내가 어찌 당신을 말리겠나. 고단한 내 팔자야. 지난해 해야 했던 숨바꼭질 올해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공항 주차장에 숨어 있는 당신을 내가 어찌 찾느냐고! 파출소 앞에서 자고 있는 '남편 찾아 삼만리'를 또 하기는 죽어도 싫어! 올해는 아예 술독이 집인 줄 알고 술독에 빠져 자는 일까지도 생기겠구나. 새해 첫날부터 머릿속이 깜깜해진다. 내일은 점쟁이라도 만나봐야겠다. "팔자가 그러니 평생 참고 살라"는 점괘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채희단(43.주부.서울 방화2동)

◆ 1월 20일자 소재는 '나만의 설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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