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에 갈 무기 절반 한국에 보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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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25때 미7사단장으로 참전했었고 55년 다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國에 왔던 「라이먼·렘니처」장군(86)은 지금 강국무성 북대서양조약기구 (나로) 연락 사무소의 방 한칸을 얻어 매일 출근하고 있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려니까 그는 자기가 은퇴하기전 4성장군의 견장을 단 모습으로 찍은 사진. 옆에 서서 찍자고 제의했다. 은퇴한지 15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모습은 거의 다른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군복 벗고·2년만 여기(국방성) 나오려 했는데 벌써 15년이 지났어요』 라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무실은 펜터건에 있지만 국방성과는 관계가 없고 지방단체나 의회에서 군사문제에 관한 연설초청이 있으면 나가서 연설하는 것이 자기의 일과라고 말했다.
다음은 「사라져 가고 있는 노병」 「렘니처」 장군과의 특별회견내용이다.
-50년6월25일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 말고요. 그날이 일요일이었읍니다. 나는 집에있다가 딸에게서 먼저 그소식을 전해들었읍니다. 그때 나는 국방성 군원처장으로 있었는데 그다음 윌요일 나토로 보낼 군장비문제에 관해 증언하도록 되어있었읍니다.
국방성에 전화를 걸어 전쟁발발을 확인한후 나는 곧 증언원고를 새로 손질했읍니다.
나토로 보내려고 마련해 놓은 무기중 절반은 한국으로보내야 된다고 문맥을 바꾼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거의 무방비 상태에 있던 한국에 중장비가 보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기에 가장 아쉬웠던 장비는 무엇이었읍니까.
▲내 체험으로는 동복이 없었던것이 가장 아쉬운 품목이었읍니다. 한국의 겨울이오죽 춥습니까. 내가 지휘한 7사단은 철원계곡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트 브레이크 능선, 펀치볼등 노출된 산허리에서 동복없이 전투를 하다보니 동상에 걸린 군인이 많이 나왔어요. 우리 부대는 그래서 한국 참전군중에서 제일먼저 동복을 지급받게 되었읍니다.
-그당시 한국군과 합동작전을 한 경험이 있읍니까.
▲우리사단 측면에 한국군이 배치되어 있었지요. 북괴군은 이 한국군의 방어선을 뚫어 우리 측면을 위협하려고 여러번 공격해 왔지만 실패했읍니다. 한국군은 그때도 잘 싸웠고 월남서도 잘싸웠어요.
-한국을 떠난후에 옛격전지를 찾아가본일이 있읍니까.
▲갔었지요. 2년전에는 한미수교 1백주년기념식참석차「레이건」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인 42명을 데리고 갔었읍니다. 그때는 철원까지는 못가고 판문점을 방문했었지요. 같이간 미국사람들에게 휴전선이 서울에서 얼마나 가까운지를 실감시키기위해서 입니다.
-장군이 보시기에 현재 남북한의 군사균형은 어떤 상태인것 같습니까.
▲평형상태입니다. 현재 수준의 준비태세만 그대로 유지하면 북의 남침이 재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6·25당시 「맥아더」장군과「트루먼」대통령사이에 있었던 전쟁규모에 대한 논쟁을 기억하시지요? 중공의 개입을 무릅쓰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고한「맥아더」장군의 주장을 장군은 지지했읍니까.
▲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이란 큰 모험을 해서 대성과를 거두었고 그 결과한국전의 양상은 결정적으로 바뀌었읍니다. 그러나 일단중공군이 개입한 다음부터는 압록강까지북진을 할래야 그럴만한 병력이 없었어요.
-미국은 전쟁중 상황이 절박해지면 미군을 전면 철수시킬 계획을 가졌었다고 2년전에 공개된 외교문서가 밝혔는데 장군은 그당시 이 사실을 알았읍니까.
▲그런 사실은 모릅니다.

<「라이먼·렘니저」장군 약력>
▲1899년8월29일 펜실베이니아주혼스데일서 출생(86세)
▲1920년 미 육군사관학교졸업
▲1941년 북아프리카 상륙작전기획
▲1944년 미 지중해군 참모장
▲1945년 북대서양조약군 창설멤버
▲1951∼52년 미 7사단장으로 한국전 참전
▲1955∼57년 주한유엔군사령관
▲1960년 미 합참의장
▲1963년 나토군사령관
▲1969년 은퇴
【워싱턴=장두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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