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유리천장 깨졌으니 몸매 관리나 하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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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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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걸 굿걸
수전 J. 더글러스 지음
이은경 옮김, 글항아리
580쪽,2만3000원

한국을 비롯한 상당수 현대 국가에서 성차별이란 대체로 과거의 일일 뿐이다. 이제 여성들은 노력만 하면 원하는 것에 접근할 수 있다. 교육·일자리·사회지위 성취에서 ‘무소의 뿔’처럼 거침없이 홀로 나아간다. 가정과 사회에서 충분한 힘도 누린다. 일부에선 여자가 오히려 남자보다 더 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시대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역차별’을 거론하기까지 한다.

미국 앤하버 미시간대 교수로 페미니스트 미디어학자인 지은이는 이런 생각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현재 ‘진화한 형태의 성차별’이 판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 성 평등이 실현됐으니 더 이상의 페미니즘 운동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형태의 성차별이란 설명이다.

과거 성차별은 ‘여자는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것에 국한됐다. 현재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성차별은 교묘하다. ‘여자는 능력이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다만 여성스러워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대중문화와 미디어는 이러한 메시지를 주문처럼 되뇌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인식이다. 바로 ‘여자는’ 날씬하며 외모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지은이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뉴스 등 대중·대량전달 매체에서 여성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여성성’이라는 도그마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숨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됐는지를 파헤친다.

지은이는 1980~90년대에 태어나 여성으로서 의식을 키워간 세대를 ‘걸 파워 세대’로 부른다. 영국 팝그룹 ‘스파이스 걸스’에 열광했던 이 세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받는 대신 ‘소녀문화’의 소비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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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방송된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은 완벽한 모성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고정된 성역할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진 글항아리]

문제는 감성을 중시한 소녀문화는 외모가 뛰어난 ‘굿걸’이 돼 잘 생긴 남자의 사랑을 받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의 인간적 성숙이나 자각에는 관심이 없다. TV쇼와 드라마는 이런 줄거리나 설정으로 ‘걸 파워 세대’에 수동적인 젠더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이에 따라 미모나 몸매가 떨어진 ‘배드걸’은 어김없이 야유와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새로운 성차별은 굳이 미국 대중문화를 거론하지 않아도 우리 눈 앞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인 ‘개그 콘서트’나 ‘코미디 빅리그’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신기한 점은 다른 소수계층을 비하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했다고 개그맨이 하차하는 일은 있어도 젠더 이슈와 외모 지상주의가 결합한 콘텐트는 별로 비난받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여성성을 앞세운 새로운 성차별이 도도한 탁류처럼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S BOX] 미드 여주인공의 필수 조건, 능력·카리스마 그리고 섹스어필

최근 미국 드라마의 특징 중 하나가 당당한 여성 주인공이 많다는 점이다. ‘그레이 아나토미’ ‘X-파일’ ‘커맨더 인 치프’ 등 미국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대통령·의사·부서장·수사반장 캐릭터는 거친 남성 사이에서도 한결같이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능력과 의지, 그리고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심지어 이들은 사회적으로 ‘거세’돼 무력해진 남성들에게 비아그라나 시알리스를 권하기도 한다.

이 당당한 여성들은 동시에 훌륭한 섹스 파트너로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지은이의 지적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여자 주인공들을 보면 낮에는 당당한 전문직으로 일하다가도 밤만 되면 섹시 코드를 발산한다. 남자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지은이는 이를 두고 강요된 여성성이 대중문화에서 왜곡된 여성 상위의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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