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의 길을 가다(14)-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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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오오사까(대판)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의 숙사는 서본원사였다. 신유한공 일행은 이 절에서6일동안 일본측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오랜 항해에 지친 여독을 풀고 활발한 문화교류의 기회를 갖는다.
당시의 서본원사는 규모가 엄청나게 큰 절이었던 모양이다.
서본원사에서는 통신사 일행뿐아니라 호행하는 대마번의 왜인들, 그리고 오오사까에서 접대를 맡은 관원들등 수천명이 같은 절에 기거했다고 신공은 『해유록』에 쓰고 있다.
그처럼 크고 운치있던 대가람이 몇차례의 화재로 개축을 거듭하다 2차대전 말기에는 전화를 입어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서본원사는 196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오오사까역에서 지하철 요쓰노바시(사교)선을 타고 2구간을 지나 혼쬬(본정)에서 내리니 서본원사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거리였다.
중심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미도오스지(어당근)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잠시 걸으니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빌딩 사이에 웅장한 절의 정문이 나타난다.
축대를 쌓고 그위에 높이 세운 콘크리트 기둥과 그뒤에 버티고선 5층의 본당건물이 주변의 고층빌딩에 조금도 위축되지않고 당당하다.

<병사배치 경비철저 수천명이 함께기거>
현대적 감각을 살린 콘크리트 구조가 절이라기 보다는 최신설계의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2백여년전 우리의 통신사 일행이 묵어 갔음직한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정문 양쪽의 높은 기둥에 붙은 「정토종본원사파 본원사진촌별원」이란 간판만이 역사의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쓰무라(진촌)병원은 오오사까에 있는 서본원사의 공식 명칭이다.
높은 계단을 올라 본당을 찾으니 큰 법회가 열리고 있는 듯 복도까지 사람이 넘쳐 혼잡하다.
사무실에 명함을 내밀고 한참 기다리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교무과로 내려가 보란다.
주간이란 직책을 가진「마끼노」(목야전정)스님을 만나 취재여행의 목적을 설명하고 통신사에 관한 자료를 물으니 예상대로 절과 함께 회진되어 아무것도 남아있는것이 없다는 대답이다.
다만 『진촌별원지』에 통신사 얘기가 잠깐 나오는것 같다며 두툼한 책 한권을 내다 준다. 1926년에 인쇄된 책이다.
목차를 뒤지니 제7장에 「방사조선사절여관이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1655년 통신사 (정사조형)때의 얘기가 장장 6페이지에 걸쳐 실려있다. 「명역원년 조선인래조후각」이란 당시의 기록을 전재하고 이로부터 진촌별원이 에도를 왕복하는 조선통신사의 숙사가 됐다고 쓰고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해의 통신사 일행은 에도로 가는 길에 9월5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그리고 귀국길인 11월23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이곳에 머물렀다.
이들을 위한 접대준비는 일행이 도착하기 6개월전인 2월28일, 마찌부교(정봉행)가 진촌별원의 주지를 불러 이절이 통신사의 숙사로 지정되었음을 통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찌부교란 막부직속의 무사로서 막부 직할지인 오오사까의 행정·치안 책임자다.

<범인처형해 일단락 소설·연극의소재로>
6월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연일 상하 관원이 별원현장에 나와 숙사의 개·보수등 준비상황을 시찰하고 독려한다.
7월7일에는 접대역으로 막부직계의 「마쓰다이라」(송평약내)란 인물이 파견되어 오고 이날부터 절에 병사를 배치, 사전 경비태세에 들어간다.
오오사까는 대도회인 만큼 만일의 사태에 대한 경비가 다른 곳에 비해 삼엄했던 듯 하다.외곽경비는 물론 숙사인 절의 경내에도 출입문 근처·마당·부엌앞등 요소마다 새로 초소를 설치한것으로 돼있다.
이처럼 경호에 신경을 썼는데도 1764년 통신사(정사 조엄)일행이 귀국길에 이곳에 묵었을때 뜻밖에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경상감영의 장교였던 최천종이 통역을 맡았던 대마번의 왜인「스즈끼」(영목전장)란 자의 칼에 찔려 숨진 것이다. 우호교린을 다진 통신사의 발자취에 오점을 남긴 사건이었다.
도주했던 범인「스즈끼」는 곧 체포되어 처형 되었지만 양측은 사건의 원인 규명, 범인 처형시의 입회문제등으로 한때 날카로운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일본측이 말다툼끝의 우발적 범행으로 본데 대해 우리측은 「스즈끼」가 통신사 일행의 관용물을 훔치려다 저지른 범죄라고 주장, 끝내 해명이 되지 않은채 범인의 처형으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삼밀매의 이익배분 문제가 발단이 됐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희귀한 이 국제살인사건은 오오사까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켜 소설이나 연극의 소재가 됐으며 지금도 가부끼(가무기·일본의 전통적인 대중연극)의 작품집에 수록돼 전해진다.
『명역원년 조선인치래조후각』에 따르면 1655년 별원에 도착한 통신사 일행은 4백75명이며 이들은 백미·송립·유지·부채·먹·붓등을 절에 시주한것으로 돼있다.
통신사 일행이 서본원사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측이 베푼 환대가 어떤 것이였는가는 『해유록』이 좀더 자세하다. 그러나 신공은 일본측의 환대를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밤에는 향연이 마련됐다. 단지 금은종이로 꽃을 만들어 칠기에 함부로 꽂았을뿐 대마도에서의 연회와 같아 음식이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대마도의 왜들은 음식을 탐내어 움켜가는것으로 일을 삼는다. 각자의 상을 다 비우고도 남기는 것을 더바라니 가소롭다.』

<접촉꺼려 외출금지 문인쇄도 밤지새워>
에도(강호)막부에서는 사행의상·하인들에게 이불과 요 4백75벌을 선물로 보내왔으나 신공은 이것도 동행하는 대마의 왜인에게 주어버린다.
당시 막부는 통신사 일행을 극진히 환대하면서도 일행이 일본인들과 접촉하는것을 꺼려 외출등 자유로운 행동은 금했다.
이것은 불의의 사고가 생길것을 우려한 보안상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일본국민들의 부끄러운 생활상을 보이지 않으려는것과 밀무역을 경계한 때문으로 보인다.
오오사까에서 단 한가지 신공을 괴롭힌것은 글을 써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대판에서는 글을 구하려는 자들이 다른곳보다 배는 더많다. 때로는 새벽닭이 울때까지 자지 못하는가 하면 밥을 먹고 있다가 입에 있는것을 뱉어내고 응해야하니 그 수응하는 수고로움이 이러했다.』(해유록)
오오사까는 막부의 직할지이므로 번에 구애 받지않고 전국의 문인들이 통신사 일행과 접촉할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신공일생을 찾아 오는 묵객들중에는 멀리 구마모도(웅본)나 호꾸리꾸(사육)지방에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앞선 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갈구와 열망이 이처럼 강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찾아 오는 사람들을 다 만날수도 없는 일이어서 호행하는 왜인들이 적당히 조절을 했으며 때로는 뇌물을 받고 사람을 들여 보내는 사례까지 있었다.
신공은 이처럼 밀려드는 문인들의 응대에 육체적으로 피로할뿐아니라 『창화해주어야할 시들이 많이 쌓이니 바빠져서 고민하나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괴로움을 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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