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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첫정…연기는 나의 '後愛', 다 가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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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 부유한 남자를 골라 결혼하지만 사귀던 애인도 버리지 않는다. 남편과 애인 모두에게 잘하는 깜찍한 여자.

'아내'의 현자.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를 7년간 보살핀다. 진짜 아내가 나타나자 눈물 바람을 하면서도 남편을 보낸다. "전 은표(아들)만 있으면 돼요."

11일 개봉하는 '싱글즈'의 동미. 나이는 '서른 즈음에'를 저절로 읊조리게 되는 스물 아홉. 성격 화통+털털. 남친과 동거 중이다. 동거라는 말에서 야릇한(?) 관계를 상상하면 오해. 말 그대로 진짜 친구로 같이 살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만취 상태에서 저지른 '하룻밤 실수'로 그만 이 남친의 아이를 가지고 만다.

위의 세 여자는 엄정화(32)가 최근 1년간 거쳐온 배역이다. 지난해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스크린에 컴백했을 때 많은 사람은 '섹시한 댄싱 퀸'이 잠깐 외도를 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얼마나 가겠어'라는 시선이 주를 이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야무진 노력파는 자신에 대한 평판에 아랑곳없이 TV와 스크린을 오가며 연기가 부업이 아니라 본업임을, 깃털이 아니라 몸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기울인 공으로만 따지면 1992년 '눈동자'로 데뷔해 댄스 가수로서는 '환갑'이라는 서른을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맹렬한 기세를 이어가고 있는 '가수 엄정화'에 못지 않았다. "이방인처럼 느껴지던 영화계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배우 엄정화'는 이제 제대로 궤도에 오른 것 같다.

우선 지난 1일 막을 내린 KBS 드라마 '아내'를 끝낸 소감부터 물었다. '아내'는 야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만 부각되는 게 싫어서 택했던 작품이었다. 화장기 없는 지고지순한 여성 현자 역을 그가 맡는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한달이 지나자 반응이 달라졌다고 했다.

"촬영 마지막날에 서운해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딱 눈을 떴는데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거 있죠. 이제 안 울어도 된다 생각하니 너무 좋아서요. '아내'가 쉬운 작품이 아니었거든요. 대사도 '하루에 조금씩만 저를 지워가세요'하는 식이어서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았어요. 매주 녹화장에 시험 치러 가는 기분이었다니깐요."

유동근이 두 아내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는 결말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참 마음에 들어요. 82년 원작에서는 현자한테 돌아가지만 전 더 큰 사랑으로 그를 보내주는 쪽을 원했거든요. 정하연 작가의 의도도 이 시대 진실한 사랑이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으니 꼭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충무로 컴백 이후 두번째 영화 '싱글즈'(감독 권칠인)의 동미는 "화끈하고 시원시원한 내 성격과 많이 닮아 애착이 가는 역할"이다. '싱글즈'는 네 명의 미혼 남녀를 둘러싼 사랑과 성, 결혼을 경쾌하면서도 진솔하게 그린 로맨틱 코미디. 실연당한 후 새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나난(장진영), 결혼보다 일이 우선이며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주장하는 동미, 두 여자 친구를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정준(이범수), 망설이는 나난에게 "난 기다리는 게 특기"라는 너그러움을 보이는 수헌(김주혁) 등 생기발랄한 네 남녀의 이야기다. 이들이 나누는 사랑과 성, 인생에 대한 거침없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특히 동미의 대사는 이보다 더 직설적일 수는 없을 정도. "무릇 모든 남녀 문제는 섹스로 시작돼 섹스에서 끝나지" "배고프다고 아무 거나 덥석 먹지 마라" "남자 하나 나타나니까 몽땅 해결되는구나. 젠장, 누군 스리고에 청단.홍단 다하는데 난 뭐냐?" 등등.

"민망하긴요. 젊은 사람들 보라고 만든 거니까 '우리 정말 저러잖아'하고 감탄할 정도로 생활에 밀착된 대사였으면 했어요." '지× 하고 있네'라는 말도? "평소에 잘 쓰는 말인데…아닌가요?(웃음) 애정의 표현이죠. 어떤 억양으로 어떤 경우에 하느냐에 따라 귀엽게 들릴 수 있는 말이잖아요."

애드립(즉석 연기)도 했다. "직장 상사가 성희롱하려고 하니까 바지를 벗겨서 사람들 앞에서 개망신 주는 장면이 나와요. 그 상사가 잘 쓰는 단어가 '테이스트(taste: 취향)'인데, 제가 망신을 준 다음에 그러죠. '팬티 (고르는) 테이스트하고는'." 결과는 대성공. 시사회 때 가장 큰 폭소가 터졌던 대목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식의 우문(愚問)을 던졌다. "둘 다 좋죠. 무대에 서서 노래 부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 객석의 열기가 그대로 제 에너지가 되거든요. 배우는 가수에 비해 좀더 외롭고 힘든 직업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여줄까 늘 골머리를 앓아야 하고 철저히 혼자 싸워야 하니깐요.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 정말 끝내주죠. 이런 직업이 또 있을까요?"

기선민 기자

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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