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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⑬ 열정을 부르는 도시, 세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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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대성당에서 내려다 본 구시가지 전경.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가수 스콧 매켄지(1939~2012)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이렇게 가사를 바꿔 부르고 싶다. ‘스페인 세비야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춤과 술을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거예요.’라고. 봄 축제가 열리는 4월이라면, 더욱 머리에 꽃을 꽂고 세비야를 활보할 일이다. 혹은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의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걸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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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의 본고장 세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형.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주도, 세비야는 열정의 도시다. 세비야의 열정은 플라멩코 리듬을 타고 흐른다. 플라멩코의 본고장답게 ‘타블라오(Tablao)’라는 공연장부터 플라멩코 박물관까지 도시 곳곳에서 플라멩코를 접할 수 있다. 로그 가요스, 엘 아레날 등 내로라하는 타블라오는 산타크루즈 지구에 포진해 있다. 산타크루즈 지구의 골목 안 상점마다 파는 기념품도 온통 플라멩코 드레스, 머리핀, 부채, 구두, 인형 등이다.

세비야 대성당 안뜰에는 오렌지 나무가 빼곡한 ‘오렌지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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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도시, 세비야의 화려함은 4월에 절정을 이룬다. 매해 부활절 2주 후 월요일 자정부터 일요일 자정까지 ‘페리아 데 아브릴(Feira de Abril)’이 열리기 때문이다. 4월의 축제란 이름처럼 그야말로 봄을 만끽하는 축제다. 과달키비르 강변의 광장에는 크고 작은 가설 천막, 카세타(Caseta)가 300여 채 세워지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밤낮없이 술잔을 부딪치거나 춤을 추며 봄날을 즐긴다. 워낙 규모가 크고 화려해 3월 중순 발렌시아에서 열리는 ‘불 축제’, 7월 초부터 중순까지 열리는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소몰이 축제’와 더불어 스페인 3대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페이라 드 아브빌에서 만난 세비야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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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중순 세비야에 갔을 때, 마침 ‘페리아 데 아브릴’의 마지막 날이었다. 과달키비르 강을 건너니 삼삼오오 축제장으로 향하는 행렬이 보였다. 누가 더 화려한가 대결이라도 펼치듯 한껏 치장한 모습이었다. 큼직한 장미를 머리에 단 여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플라멩코 의상의 완성은 머리 장식인 것 같아 보였다. 당장 전통 의상을 사 입을 순 없는 노릇이니, 꽃장식을 사서 머리에 꽂았다.

축제장 안의 열기는 한낮의 태양만큼 뜨거웠다. 색색의 카세타 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느 카세타를 기웃거리다, 흥에 겨워 춤을 추던 할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술잔을 들고 다가오는 게 아닌가. 잔에는 레부히또(rebujito)가 가득 담겨있었다. 레부히또란 화이트 와인에 사이다를 섞은 축제용 술로, 달콤하고 청량한 맛이 특징이다. 레부히또 두 잔을 연거푸 권하는 할머니 덕에 기분이 플라멩코 치맛자락처럼 나풀나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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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라 드 아브빌에서 만난 세비야의 여인들.

대형 카세타에선 무대 위의 세비야나스(Sevillanas) 춤판이 한창이었다. 세비야나스는 플라멩코의 특징과 정서가 녹아 있는 세비야 민속춤이다. 구경만 해도 어깨가 들썩거렸다. 손뼉을 치며 바라보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일행을 무대 위로 잡아끌었다. 도저히 못 이기는 척 함께 춤을 췄다. 폼은 엉성해도 리듬을 탈수록 흥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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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겹게 춤을 추다가 내게 레부히또를 권한 할머니.

또 다른 카세타에선 할머니들과 나란히 앉아 레부히또를 홀짝이며 아름다운 모녀의 플라멩코를 감상하는 행운을 얻었다. 카세타는 가족이나 친구를 중심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초대 없이 들어갈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환대를 받다니 운이 참 좋구나 싶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술잔이 비기 무섭게 듬뿍 채워주는 할머니들 덕에 이방인을 뜨겁게 맞아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머리에 꽃을 단 정성이 갸륵해서가 아닐까 추측하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

세비야 사람들의 열정이 낳은 것은 플라멩코와 축제만이 아니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난 곳도 세비야다. 그가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스페인 국왕을 알현했던 곳이 알카자르 궁전이다. 콜럼버스 무덤 또한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돼 있다. 그의 관은 스페인 국왕들의 조각상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앞쪽 조각상의 오른발을 만지면 세비야에 다시 오게 된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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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르르 빛나는 조각상의 발, 이 발을 만지면 세비야에 다시 오게 된단다.

세비야에 처음 갔을 때, 나는 그 조각상의 발을 오래오래 붙잡고 소원을 빌었다. 세비야에 다시 오게 해달라고. 이왕이면 오렌지꽃 필 무렵에. 2년 뒤 거리마다 오렌지 꽃향기가 은은하게 번지는 4월의 세비야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이제 매년 4월이면 세비야의 오렌지 꽃향기와 ‘페이라 드 아브릴’의 카세타에서 마신 레부히또의 달콤한 맛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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