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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TALK] 공부란 ‘내 안의 프로메테우스’를 깨우는 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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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공부할 권리』 정여울 작가·평론가

정여울(39·사진) 작가는 자신의 글을 ‘퓨전푸드식 인문학’이라 소개했다.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정통 인문학 위에 심리학·대중문화·여행을 통해 얻은 지식을 더해 자신만의 인문학으로 재창조했다. 다방면에 꾸준한 공부를 해온 만큼 저작도 다양하다. 문학평론이라는 본래의 영역에서 『문학 멘토링』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등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왔다. 여행으로 얻은 통찰을 에세이로 엮거나 철학으로 영화 읽기를 시도하는 등 취미의 영역까지 인문학으로 풀어냈다. 최근엔 『공부할 권리』라는 책으로 자신의 공부 여정을 차분히 고백했다. ‘공부란 나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설명하는 정 작가를 만났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누군가의 위로보다 나를 찾는 공부
사회 부속품이 아닌 인간임을 일깨워줘

-책 제목이 『공부할 권리』다. 공부를 의무가 아닌 권리라 표현하다니.

 “이미 주변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웃음). ‘공부에 한 맺혔느냐’고 놀리는 분도 계셨다. 한 맺혔다는 표현도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찾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 사회가 원하는 공부에 치였던 순간이 안타깝다. 돌이켜보면 의무로서의 공부를 하느라 괴로웠던 중고교 시절에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소개받았던 것 같다. 나는 문학이 좋았고 역사가 좋았다. 의무로서의 공부를 하면서 권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게 행운이고 행복이었다.”

 -그간 작가가 수많은 책을 읽으며 고민하고 성장한 과정을 담아 일기장을 들춰보는 듯한 느낌이다.

 “맞다. 책을 읽으며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는 과정이 이 책에 담겼다. ‘나’라는 대상이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하기 때문에 공부는 끊임없이 해야 하는 거다. 또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도 상당한 괴리가 있다. 전자가 페르소나라면 후자는 그림자로 표현할 수 있다. 공부를 하면서 이 그림자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끌어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공부는 선물이자 권리다.”

 -공부를 통해 깨닫고 인정하게 된 자신의 그림자는 무엇이었나.

 “장녀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거기서 끝없이 도망치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이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이 그림자에서 나를 구원해준 건 『일리아드』 의 주인공 헥토르였다. 그는 신과 전쟁을 치러내는 인간이다. 그 와중에 늙은 아버지를 모셔야 했고, 무책임한 동생 파리스를 돌봐야 했다. 백성을 전쟁에서 건져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까지 그의 몫이었다. 헥토르를 통해 내가 도망치려 했던 책임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가치인지 깨달았다. 그 고통이 나를 자라게 해준 자양분이었던 거다.”

 -인문학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한다. 현대인들에게 “네가 사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비난으로 읽혀 불편해지기도 한다.

 “그건 오해다. 인문학의 역할은 ‘당신은 사회 시스템 속의 하나의 부속품이나 소모품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인간임을 잊지 말라’고 계속 일깨워주는 거다.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나 역시 쉽게 패배주의에 젖어든다. ‘내가 바꿔봤자 뭐가 달라지겠느냐’는 자포자기적인 생각이 공기처럼 내 안으로 파고든다. 이때 인문학은 내 안의 프로메테우스를 다시금 깨워준다. ‘사회가 이 모양이니까’라는 포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 작은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다.”

 -인문학이 불편하다는 현대인에게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다. 안티고네는 내가 그리스 고전을 읽다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한 주인공이다. 안티고네는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왕의 딸이다. 아버지가 자기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떠돌 때, 안티고네는 그를 따라나서 돌봤다. 외삼촌 크레온과 권력 다툼 중 죽은 안티고네의 두 오빠의 시신이 광야에 까마귀 밥으로 던져지자 국법을 어기고 오빠의 시신을 땅에 묻고 장례를 치른다. 10대 소녀인 안티고네가 잔인한 왕 크레온에 맞서 ‘우리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사랑하려고 태어난 것’이라 외치는 소리는 너무 순수해서 충격적이다. 안티고네는 사회 통념과 법, 그보다 앞서는 인간성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독서를 통해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는 당신만의 독서법을 알려준다면.

 “나의 로망은 『니체 전집』 같은 여러 권의 두꺼운 책에 6개월 정도 푹 파묻혀서 그 안에만 침잠하는 독서를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직업으로 책을 읽고 원고를 써서 빨리 넘겨야 하는 현실에서의 나는 거의 정신 분열적인 독서, 난민의 독서를 하고 있다. 한꺼번에 여러 권의 책을 항상 쫓기면서 읽는다. 이런 난민의 독서를 하면서도 메모는 항상 한곳에 모아서 한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모아놓은 메모가 초고의 초고가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메모할 때는 키워드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완결된 문장 형태로 적는다. 그래야 메모한 순간의 느낌과 정서가 쉽게 재생된다.”

 -힐링 열풍에 대해 경계하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최근 몇 년간 인문학의 키워드는 힐링이었는데.

 “인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오히려 혼자 있는 법이다. 고독을 자초하고 그 안에서 고민하며 나를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거다. 대규모 인문학 강연에서 던져주는 위로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렵다.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찬찬히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가운데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깨달음이 건져 올려지는 거다. 소통 과잉도 경계할 부분이다. 속상해서 미칠 것 같을 때, 책 속으로 도피해보라. 10분·20분 집중해서 읽다 보면 그 마음이 가라앉는다. 소통하겠다며 당장 누군가를 메신저로 불러내 화내고 투덜대고 쏟아내면 가라앉기는커녕 기름 붓듯 증폭되는 일이 허다하다. 인문학이 강조하는 건 즉각적 소통과 위로가 아니라 기다림과 인내의 진득한 자세다.”

공부가 권리임을 깨닫게 해준 책 4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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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융: 기억·꿈·사상』
카를 구스타프 융 지음, 조성기 옮김, 김영사

책 외관만 보면 다소 두꺼워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막상 펼쳐보면 어려운 이론서가 아니라 자서전이라 쉽게 읽을 수 있다. 개인의 역사를 담았지만, 어느 학교에 들어가고 누구와 결혼했다는 식의 내용은 없다. 저자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묘사한 내용을 읽다 보면 삶의 주체가 외부의 사건이 아닌 우리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을 조명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메디치미디어

철학 에세이집이다. 철학이라고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에서 철학적 주제를 끌어내고 사유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저자가 장애인이나 죄수를 대상으로 철학을 강의하며 찾아낸 철학적 주제들이 읽기 쉽고 재미있게 제시돼 있다. 제목을 ‘철학자와 하녀’라 지은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 밝혔다. 감동적인 내용이라 직접 확인하길 권한다.

『한국철학사』
전호근, 메멘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만 익숙했던 우리에게 한국철학이라는 독자적인 흐름이 있었음을 감동적으로 증언해주는 역작이다. 신라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대표적인 철학자의 사유를 소개했다. 유학과 불교, 동학, 기독교를 넘나드는 폭넓은 내용과 깊이 있는 시각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책이 강의체로 쓰인 것도 큰 장점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을 친근한 구어체로 풀어 거부감없이 읽힌다.

『시민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현주 옮김, 당그래

『월든』을 쓴 저자가 이 책도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독자가 많다. 『시민 불복종』을 『월든』보다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저자가 강조한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참다운 인간은 집단이 강요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문장은 『월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면 소로가 주체적 개인, 사회와 자연 속에서 개인이 지켜야 할 가치와 책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글=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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