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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기자 중앙일보 모바일서비스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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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디지털제작실장

처음에는 직접 걸어보려 했습니다. 역에서부터 걸어서 몇 걸음인지를 보여주면 효과적일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포기했습니다. 아,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부동산 중개 서비스 얘깁니다. TV에서 광고를 하도 많이 하기에 검증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역세권’이라고 표기한 곳은 정말 지하철역에서 가까운지 따져보자는 거였죠. 취재팀이 직접 걸어보고 시간과 걸음 수를 영상으로 제시할 계획이었고요. 그런데 포기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걷고 말고 할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중개서비스 애플리케이션(앱)에서는 디지털 지도에 위치가 콕 찍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은 이렇게 위치에 대한 꼼수를 해결했습니다. 적어도 ‘역세권’이란 말을 믿고 방 보러 갔다가 헛걸음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소비자의 이런 불만은 수십 년을 이어졌는데 이제, 해결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방을 실제보다 넓어 보이게 사진 찍는 법 등은 인터넷에서 흔히 검색할 수 있습니다. 새로 등장한 디지털 꼼수입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수십 년간 안 고쳐진 부동산 과장광고를 해결한 것은 무엇입니까. 디지털이라고요. 그러면 새로 등장한 꼼수는 도대체 뭡니까.

또 있습니다. 모텔을 찾아주고, 추천하고, 예약하는 서비스가 인기입니다. 요즘 2030세대는 모텔에서 파티도 하고, 시험기간에는 공부방으로도 씁니다. 커피숍 포인트 적립하듯 멤버십 포인트도 찍습니다. 덕분에 모텔은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를 벗고 있습니다. 모텔을 오직 러브호텔로만 기억하는 기성세대에겐 어리둥절한 일입니다. 시내 중심가에 숙박시설이 넘치는데 정작 가족 여행을 가면 잘 곳이 없었던 역설이 해결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역세권 꼼수’처럼 수십 년간 요지부동이었던 바로 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서비스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야놀자’는 대표적인 모텔 앱인데 이 회사는 일부 모텔을 직접 운영합니다. 모텔에서 올린 정보와 실제 정보가 다르다는 고객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입니다. 모텔을 바꾼 것은 모바일 앱입니까.

아닙니다. 판을 바꾼 것은 수십 년간 쌓인 고객의 불만에 주목한 사람입니다. 주먹구구 대신 사업다운 사업에 도전한 사람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그저 좋은 도구일 뿐입니다. 디지털이 많은 것을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화로 위기에 처한 업계는 대체로 수십 년간 보이지 않는 카르텔이 형성돼 새로운 진입자가 없었던 분야입니다. 동시에 소비자 불만을 해결하지 못했거나 알고도 모른 척해 온 영역입니다. 모텔업이 그렇고, 부동산 중개업이 그렇습니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핵심은 바뀐 게 없습니다. 고객 말입니다.

사족 하나 답니다. 당선의 기쁨에 취해 있을 분들께 말입니다. 어떻게 이겼든, 어느 당이든 당신이 주목해야 할 핵심은 불만 가득한 시민일 뿐입니다. 어제와 완전히 다른 아침을 맞고 있겠지만 사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김영훈 디지털제작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