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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곧 국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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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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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

20대 총선의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13일 낮 12시쯤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투표소를 찾았을 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투표장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꽤 눈에 띄었다. 30~40대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온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50대 후반 이상으로 보이는 장·노년층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투표 열기가 높은 연령층이라 오전에 일찍 다녀갔나 싶었다. 20대 중반이라고 밝힌 청년에게 말을 걸어봤다. “솔직히 이민 가고 싶었어요. 취업도 어렵고 희망도 없고….” 어느 정당에 투표했는지 밝히지 않은 그는 “원래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데 일부러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 6시 출구조사에 이어 발표된 개표 결과는 놀라웠다. 전문가들의 전망이나 사전 여론조사에서 한 번도 예측된 적이 없는 집권 여당의 대패와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의 1당 등극, 그리고 국민의당의 성공이 확인됐다. 이유가 궁금해 지인의 대학생 자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잠을 안 자고 개표 방송을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가 이번에 그랬습니다. 제 한 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던데요.”

여당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총선 결과가 젊은 층의 투표율이 높아진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총선 결과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빡친 20대와 등 돌린 40~50대의 힘”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난 보수 성향인데 도저히 새누리당은 못 뽑겠더라” “국정교과서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때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안 듣더니 선거철이 되니 무릎을 꿇는 연기가 먹힐 줄 알았느냐” “난 대구 토박이인데 이번엔 더불어민주당 찍었다. 새누리당 정신 차려라”…. 박근혜 정부와 여당을 질책하는 반응이 넘쳐났다.

수도권 접전지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텃밭인 호남을 국민의당에 내준 더민주, 그리고 제3정당의 지위를 굳힌 국민의당에도 덕담보다 경고를 전하는 이가 많았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새누리당이 못해 득을 본 것뿐이다. 기세등등하지 말고 뽑아줬으니 혁신적 정치를 선보여달라” “새누리뿐 아니라 더민주도 과반을 얻지 못했다. 더민주가 삽질을 하면 새누리 지지가 폭등하는 건 시간문제다. 대충하다간 대선에서 또 참패할 거다.”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또 다른 특징은 정치권의 움직임을 기다리지 않고 유권자들이 먼저 변화를 택하고, 그 결과물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14일 여의도 거리에서 만난 30대 초반 회사원은 “대구 출신인데 수성갑에서 더민주 김부겸 후보가 60% 넘는 표를 얻고, 전남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가 다시 뽑히는 것을 보며 국민들이 자랑스러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호남이 지지 정당을 한꺼번에 바꿔버리면서 야당을 견제하는 제2의 야당을 만든 것도 놀랍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국민이 곧 국가라는 걸 보여준 것 아니겠어요 .” 함께 길을 걷던 동료 회사원은 “투표에 참여한 20대들에게 고맙다고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