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의 노인구박 안내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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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국 목욕탕에 나불은 「경로」구박의 안내문은 우리사회 복지의 현주소와 구조적 모순을 너무도 환하게 드러냈다.
「일요일·공휴일·손님많을 때 오지말라」「꼭두새벽 첫손님으로 오면 환영을 못받는다」.
솔직한 요구의 핵심은 그 중에도 「노인 등에 대한 50% 할인은 정부가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업소의 출혈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폐를 끼친다는 미안한 마음을 가져달라」는 대목일 것 같다.
울며 겨자먹기 경로우대에 불만이 가득찬 업계의 심정을 수식없이 토로한 표현은 얼마나 솔직한가.
수사와 둔사가 횡행하는 정치부활의 계절에 이처럼 솔직한 「엄계」의 소리는 역설로 신선감(?) 조차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안내문은 명백히 경로우대라는 제도의 명칭이 내포하는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오히려 그 정면에서의 부정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경로우대」를 말하면서 노인을 구박하는 내용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자감축의 고육책으로 이 느닷없는 안내문을 내붙여 노인들을 서럽게 하고 시민들을 당황·분노케 했던 목욕업협회는 여론이 일자 문제의 안내문 수거에 나서 소동은 단막의 해프닝으로 끝나게 됐다.
그러나 소동에서 드러난 우리사회 복지시책의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다.
복지는 쉽게 말해 곧 돈이다.
제5공화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복지」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좋은 일이었다.
노인·장애자·영세민 등 각종 복지시책이 이 몇해동안 확대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복지는 대부분의 경우 정부재정이 아니라 민간업계의 부담으로 지워져있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경로우대제」도 그 하나다. 82년 그 이전의 산발적인 노인우대제도를 종합해 확대 시행한 「경로우대제」는 각종교통수단과 고궁·극장 등 편의·문화시설을 이용하는 65세이상 노인들에게 전액 또는 50%할인을 해 주도록 했다. 할인대상은 초기의 8가지에서 지금은 13가지로 늘어났다.
그중 정부가 운영하는 것은 지하철·전철·철도·고궁·박물관·국립공원정도이므로 나머지는 모두 민간사업자가 노인복지비용을 부담하는 셈이다.
생색은 정부가 내고 부담은 업계가 지는 복지시책에 업계에서는 시행초기부터 불평들이 많았다. 경로우대의 명분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일방적인 부담만의 강요에 대한 불만이었다.
시내버스의 경우 전액무료가 결정되자 『정부가 운영하는 지하철·철도는 50%할인밖에 안해주면서 민간업자들에겐 무료로 태우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경로의 명분에 아직껏 냉가슴이다.
공짜손님 노인들에대한 시내버스불친절은 요즘도 종종물의를 빚고 있는 것은 강요된 선심의 어쩔수 없는 결과라 할 것이다.
이번 목욕탕업계의 반발과 경로우대제 철폐주장도 이같은 민간부담강요 복지시책에대한 이의제기다.
복지가 말그대로 복지이기위해서는 억지 선심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봉사가 가능해야한다. 일방적으로 손해보는 사람이 없는 제도적장치로 바꿔어야 한다. 그래야만 항구적인 복지시책이 될 수 있다.
우리사회의 「억지」들이 하나 하나 풀려가는 마당에 의욕만 앞선 복지시책은 바탕부터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해당업계만의 시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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