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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 정한 후보는 본선 패배 징크스, 딜레마에 빠진 공화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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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10면

미국 대선 공화당 경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6일(현지시간) 뉴욕주 베스페이지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 달라’는 구호가 적힌 옷을 입고 선거유세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AP=뉴시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공화당 경선에서 참패한 도널드 트럼프는 지지자를 향한 연설이나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대신 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는 공화당 기득권의 공격을 견뎌내고 있다. 위스콘신 주지사와 보수 성향의 라디오 진행자, 모든 당 조직이 테드 크루즈(상원의원·텍사스)를 지지했다. …크루즈는 꼭두각시보다 못한 ‘트로이의 목마’가 되어 트럼프의 후보 지명을 훔치려는 당 지도부에 이용당하고 있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주장은 사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한 달 전만 해도 트럼프는 독주하며 대선 본선 직행 가능성을 키우고 있었다. 이때부터 공화당 주류 진영은 경선 목적을 후보 선출이 아닌, 트럼프 저지로 본격 수정했다. 당 주류 인사들은 “트럼프를 막기 위한 투표를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지난달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재 선거는 트럼피즘(Trumpism)과 공화주의(Republicanism)의 경쟁”이라며 “유타주 경선에서 크루즈에게 투표하겠다”고 했다. 앞서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를 공개 지지했던 그는 “트럼프가 아닌 공화당원을 후보로 선출하기 위해선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가 열려야 하고, 그러려면 크루즈가 많은 경선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썼다. 트럼프는 대의원 40명이 걸린 유타의 승자독식 경선에서 패배했다.

트럼프 ‘매직넘버’서 100명 모자랄 듯당과 언론의 견제를 받는 그가 가장 깔끔하게 후보가 되려면 마지막 경선인 6월 7일까지 대의원 과반을 확보해야 한다. 이른바 ‘매직넘버’, 전체 대의원 2472명의 과반인 1237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스콘신에서 6명을 확보하는 데 그치면서 트럼프가 ‘매직넘버’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현재 트럼프가 확보한 대의원은 742명. 남은 대의원 770명 중 60% 넘는 수를 추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미 언론은 트럼프가 ‘매직넘버’에서 약 100명 모자란 대의원을 얻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위스콘신 경선을 기점으로 공화당 경선 판도는 급변했다. 트럼프 대세론은 무너졌고, 공화당 주류가 입맛에 맞는 후보를 뽑을 수 있는 중재 전당대회 가능성은 커졌다. 중재 전당대회는 공화당이 1948년, 민주당이 1952년에 마지막으로 치렀다. 공화당 최종 후보를 지명하는 전당대회는 7월 18~21일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다. 허핑턴포스트 등 언론은 이 자리가 논쟁적 정치 현장으로 미국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 예고하고 있다.


통상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본선 후보가 결정된다. 이때 대의원들은 경선에서 할당된 후보에게 의무적으로 투표해야 한다. 경선 결과가 거의 그대로 반영된다. 공화당은 1976년 이후 유력 후보가 압도적 경선 승리로 대선 후보가 됐다. 그러나 올해처럼 과반 후보가 없을 땐 변수가 생긴다. 경선을 중도 포기한 후보가 확보한 대의원들이 ‘자유투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탈락 후보의 대의원은 마코 루비오 171명, 벤 카슨 9명, 젭 부시 4명, 랜드 폴, 마크 허커비, 칼리 피오리나가 각각 1명씩이다. 총 187명이다. 이들이 몰표를 준다면 트럼프가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그러나 루비오는 자신의 대의원들에게 ‘1차 투표까지는 나에게 투표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유권자에게 트럼프를 막을 기회를 주겠다”고 표 단속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가 1차 투표에서 승부를 결정짓지 못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중재 전당대회인 2차 투표가 치러져야 한다. 2차 투표에서 대의원들은 경선 결과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투표할 수 있다. ‘중재’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여기선 지도부의 입김이 개입된다. 그래서 트럼프도 크루즈도 못마땅한 당내 주류가 ‘제3의 후보’를 추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언론이 유력하게 꼽는 인물은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다. 지난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보좌관을 지낸 칼 로브는 보수성향의 라디오 토크쇼 ‘휴 휴잇 쇼’에 출연해 “11월 선거에서 이기려면 ‘신선한 얼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정인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새 얼굴’이 라이언을 지칭하는 암호라고 전했다. 존 베이너 전 하원의장은 벌써 지지를 선언했다. 지난달 플로리다에서 열린 미국선물협회(FIA) 회의에서 베이너 전 의장은 “1차 투표로 결정짓지 못한다면 (후보로 나선) 누구도 지지하지 않겠다. 나는 폴 라이언을 우리 당 후보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화당 주류가 한마음이라도 제3의 인물을 후보로 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라이언 의장의 경우 “나는 신선한 얼굴이 아니다”며 고사 중인 데다 경선에 등장하지 않은 사람을 내세우는 건 경선 과정을 모조리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류 엘리트가 유권자의 선택을 무시하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실제 과거의 중재 전당대회가 그 후유증을 보여준다.


103회 투표 끝에 뽑은 1924년 민주당 후보1924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던 민주당의 중재 전당대회는 역사상 최악으로 남았다. 16일 동안 103회 투표를 했다. 접전을 벌인 후보는 알프레드 스미스 뉴욕주지사와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의 사위인 변호사 윌리엄 매커두였다. 스미스는 뉴욕을 좌지우지하던 파벌 ‘태머니홀’의, 매커두는 백인 우월주의 집단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KKK)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대중적 인기를 얻은 KKK를 인정할지 여부를 놓고 분열됐던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막장으로 치달았다. 특정 종교·인종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했고 주먹다짐이 오갔다. 두 사람 모두 ‘대의원 3분의 2 확보’라는 기준을 채우지 못해 100번 넘는 투표가 이어졌다. 결국은 둘 다 경쟁을 포기했다. 타협 끝에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뉴욕의 변호사 존 데이비스가 후보가 됐다. 그러나 어부지리로 뽑힌 그는 본선에서 공화당 후보 캘빈 쿨리지에게 패배했다. 지난달 16일 NYT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너덜너덜해진 공화당의 모습에서 1924년 민주당의 모습이 엿보인다”고 전했다.


양당이 마지막으로 치른 중재 전당대회도 신통찮았다. 194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선 토머스 듀이 뉴욕주지사가 3차 투표 끝에 후보가 됐다. 그는 승리할 거란 예측을 깨고 민주당 해리 트루먼에게 고배를 마셨다.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대통령인 트루먼이 막후에서 지지한 아들라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가 후보로 지명됐다. 경선에선 에스테스 캐퍼버 테네시 주지사가 앞섰지만 민주당은 “더 온건하다”는 이유로 스티븐슨을 선택했다. 그 역시 대선에서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패했다.


중재 전당대회는 아니지만 19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당 주류 뜻대로 후보가 선출됐다. 경선엔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전당대회를 앞두고 케네디 의원이 암살당하면서 당은 혼란에 빠졌다. 분열은 심화됐고 린든 존슨 대통령을 비롯한 당 중진이 경선에 나서지 않은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밀기 시작했다. 당시엔 당 지도부가 지명할 수 있는 대의원 숫자가 많아 경선에 참여하지 않은 험프리가 전당대회 투표에서 과반을 얻을 수 있었다. 민심과 괴리된 결과는 후폭풍을 몰고 왔다. 매카시를 지지하는 반전(反戰)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해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험프리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에게 처참하게 패했다.


이처럼 유권자가 아닌 당이 정한 후보는 여지없이 패배했다. 중재 전당대회 선출 후보 중 대통령이 된 이는 1932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마지막이었다.


“강력한 중재자 없어 격렬한 논란 예상”더구나 현재 공화당이 중재 전당대회에서 새 인물을 내세우려면 경선 규칙도 바꿔야 한다. 2012년 도입한 규칙은 “대선 후보가 되려면 최소 8개 주에서 대의원 과반을 확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재 전당대회보다는 트럼프 지명이 낫다는 견해도 나온다. 월간지 애틀랜틱은 최근 “중재 전당대회엔 강력한 중재자(broker)가 필요한데 공화당엔 그런 인물이 없다. 중재자 없이 경선 규칙을 바꾸려면 격렬한 논란만 벌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또 “과거엔 밀실에서 논의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엔 토론·협상 내용과 각종 루머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바로 공개된다”며 “당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로 인한 혼란으로 1968년 민주당 사태가 재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17일 사설을 통해 “트럼프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공화당은 중재 전당대회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P는 “중재 전당대회를 통해 헌법을 수호하는 후보를 지명하고,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트럼프를 패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트럼프는 중재 전당대회가 가시화되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달 31일엔 공화당 전국위원회의의 라인스 프리버스 의장을 만나 전당대회 규칙과 대의원 확보 등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온라인매체 살론은 “주마다 다른 경선 방식과 전당대회의 규칙을 제대로 몰랐던 트럼프가 분위기를 파악한 것”이라고 전했다. 폴리티코도 “그가 자신에게 절대 불리한 중재 전당대회를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트럼프는 ‘대의원 사냥꾼’이라 불리는 공화당 전략가 폴 매너포트 등을 영입했다. 매너포트는 대의원 확보와 경선 전략의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트럼프는 전당대회를 위해서는 공화당 주류와 마냥 다툴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도 이른 것으로 보인다. ABC방송은 트럼프 캠프 인사들이 연방의원들과 정례모임을 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전략 수정의 첫 시험대는 19일에 열리는 뉴욕주 경선이다. 현재 트럼프는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7일 뉴욕포스트에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밝혔다. NYT에 따르면 몬머스대가 6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52%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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