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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자존심 짓밟고 모욕 주며 내쫓는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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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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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

흔히 자존심이 밥 먹여주느냐고 하지만, 사람은 밥만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는 아니다. 때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불사하는 존재가 사람 아니던가. 영국 격언에 ‘자존심은 악마의 정원에 피는 꽃이다(Pride is a flower that grows in the devil’s garden)’라는 말이 있다. 이때 쓰는 단어인 자존심, 즉 pride는 자존감과는 약간 달라서 자기와 남을 비교하고 스스로를 어쩌면 실제보다 조금 더 높이 평가해 내고야 마는 것이라 때로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니 소중히 가꾼 한 떨기 꽃과도 같은 자존심을 짓밟는다면 부르르 떨쳐 일어나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악마의 정원에 핀 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한국에서 퇴직을 시키고자 하는 직원을 잘라내는 데는 매우 다양하고도 모욕적인 방법이 동원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연고도 없고 출퇴근도 불가능한 먼 곳으로 발령을 보내는 것은 양반이고, 하루아침에 본인이 내내 해 온 직무와는 관계도 없고 직급도 한참 낮은 보직으로 변경한 후 그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최하위의 업무평가를 줘 해고의 명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십 년 책상물림이었던 부장님에게 전봇대 관리를 맡기거나 땅을 파게 하는 식이다. 또는 몇 년 전 잘못 처리된 식대 영수증 같은 것을 다시 끄집어내 새삼스러운 징계를 진행하기도 한다고 한다. 동료들에게 퇴직 대상자로 선정된 해당 인들에게 말을 걸거나 친한 척하지 못하도록 하고, 책상을 빼 하루하루 보낼 곳을 찾아 헤매게 하거나 비록 책상을 빼지는 않되 오로지 사물함 문짝만을 바라보고 종일 앉아 있도록 배치하기도 한다. 컴퓨터를 회수하는 것은 물론 허용되던 휴대전화 사용도 못하게 한다. 화장실을 갈 때도 보고를 하고 가도록 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화장실 가는 횟수를 제한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아직 퇴직을 하지 않았는데도 회사 출입카드를 정지시켜 이미 이 회사 사람이 아님을 주지시키는 예도 있다. 참으로 기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정 연령대 이상 퇴직자의 재취업이 거의 불가능하고 거기에 사회 보장이 매우 취약한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방법들이야말로 자존심이 내 가족 밥 먹여주느냐며 버티고 버티던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떨쳐 일어나 회사를 뛰쳐나가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행위들이 허용되고 있다니 그것이 더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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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해고 결정을 선뜻 내리지는 않는 반면 일단 결정하는 순간 이번에는 가능한 한 단시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르고 싶어 하며, 또한 결정된 해고 대상에게 순식간에 매우 냉정하고 모진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한국 회사들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거나 잘 지내보려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회사들도 역시 그렇다. 영국법에 따라 해고를 진행하려면 정당한 해고 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법에 정해진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대개의 한국 회사들은 이에 소요되는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고 싶어 한다. 예전에는 여기에 더하여 때로는 모욕을 가하고 싶어 하기조차 했다.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국에 진출해 있는 한국 회사가 직원을 해고하면서 무리하게 절차를 위반하거나 모욕을 가하는 일을 최근에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법에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거나 모욕을 가하면 부당한 해고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경우 손해배상금, 법률 비용 등을 지불해야 하고 운이 나쁘면 신문에 보도돼 회사 평판이 바닥에 떨어지기 딱 좋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니 한국에 있는 회사들이 그 직원들을 쫓아내면서 놀랄 정도로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여전히 자행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다. 강력히 처벌되지 않을뿐더러 평판에 치명적인 해가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모욕에 동참하고 때로는 더 열렬히 나섬으로써 충성심을 보여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최근 보고 있자 하니, 지독히 모욕적인 방법을 써서 사람을 단칼에 잘라내고 오만정 떨어지게 하는 것이 비단 회사에서만 아니라 한국 정치에서도 쓰이는 방법인 것 같다. 그래도 크게 욕을 먹지 않는 데다가 설득하고 합의해 온건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싸게 든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필요 없는 존재로 결정되는 순간 역시 저런 식의 모욕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상존하는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바람직한 것이겠는가. 게다가 자존심이 심하게 상한 사람이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모욕은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도 아니다. 또한 늘 모욕을 가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도 없다. 오늘 모욕을 가한 자가 내일은 모욕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김세정 런던 GRM Law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