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혁명 올라탄 판교는 창조경제의 출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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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6 면

“한국 경제는 곤란과 희망이 병존하지만 희망 쪽이 곤란보다 크다.” 판교테크노밸리의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서 나오는 일관된 목소리다. 이 포럼은 연매출 500억원 이상 되는 기업들과 주요 기관의 최고경영자(CEO), 대학 총장 등 약 100명으로 구성된 판교 모임이다. 판교에는 글로벌 CTO(최고기술인) 포럼, 1조 클럽(매출 1조를 지향하는 기업들) 등 여러 모임이 있다. 글로벌 리더스 포럼은 이들 모임의 대표 격으로 판교 어젠다를 만드는 게 주 역할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셉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세계 경제를 ‘대정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판교 CEO들은 신 산업혁명의 ‘대조류’를 선도해 정체를 넘어서겠다고 다짐한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3D프린팅, 빅데이터, 드론, 무인자동차, 로보틱스, 지노믹스 등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이 지구촌을 확 뒤집고 있다. 미국발 정보기술(IT) 혁신과 독일발 제조 혁신이 빚어내고 있는 과학기술 혁명이다.


판교는 이 혁명의 주류를 타고 있다. 판교는 한국 경제의 대동맥이다. 부천-시흥-구로-양재-판교-광교-기흥-평택으로 이어지는 ICT벨트와 성남(의료기기)-판교-광교-화성(향남 의약단지)로 이어지는 BT벨트가 교차하는 곳이다. 판교는 20·30대 젊은 인재 7만 명이 매일 출퇴근하는 콤팩트 시티이며 이 중 여성이 25%를 차지하는 젠더시티다.


판교는 클러스터 혁신단지다. 산업단지의 진화 역사를 볼 때 현재 최첨단으로 진화한 형태다. 1960~80년대 조성된 성남일반산업단지(174만㎡, 3100개 기업, 4만 명 근로자, 10조원 매출)에서 80~90년대 만들어진 인천 남동공단(957만㎡, 6800개 기업, 9만 명 근로자, 25조원 매출)으로 진화했다. 10년 전부터 조성된 판교테크노밸리(66만㎡, 1000개 기업, 7만 명 근로자, 70조원 매출)는 ICT와 BT 등 첨단 업종이 집중 포진하고 있다.


판교를 170년 번영의 비결을 가진 지멘스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즉 ▶이노베이션 ▶오너십 문화 ▶협업적 네트워크 등 3요소를 지적한다. 미국의 와튼 스쿨이 케이스 스터디를 한다고 하고, 세계은행은 판교 모델을 개발도상국에 적용하겠다고 한다. 이미 중국의 중관춘(中關村)과 러시아의 실리콘 밸리인 스콜코보 테크노파크와 협약을 맺고 인력과 기술교류를 하고 있다.


며칠 전 판교를 상징하는 두 개의 이벤트가 있었다. 구글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이 열리기 바로 전날 알파고 개발자와 독일의 AI 연구소장 등을 불러 개최한 ‘AI 콘퍼런스’다. 700개 좌석을 가득 채우고도 많은 사람이 서 있어야 할 만큼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판교가 이미 AI의 본거지임을 방증한 셈이다.


두 번째는 마지막 바둑 제5국을 두는 날 재외공관장(대사·총영사 등) 93명이 판교를 찾은 것이다. 판문점을 가느냐 판교를 가느냐를 놓고 논의한 결과 압도적으로 판교를 희망했다는 후문이다. 박노벽 주러시아 대사는 “이제는 외교도 기술경제 외교가 중심이 되고 있다” 고 말했다. 이날 터키·스리랑카·페루 등 여러 나라 대사가 판교와 주재국들을 연결시키자고 제안했다. 판교는 경제이고 경제는 국력이며, 이는 외교로 수렴한다. 판교는 외교인 것이다.


판교에도 약점은 있다. 흔히 판교는 3무(無)라고 한다. “판교에는 대학이 없다, 문화가 없다, 스토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판교 10년의 대역사(大役事)가 마지막 건물인 ‘스타트업 캠퍼스’ 개소로 마무리된다. 이곳이 판교의 3무를 해소할 터전이 될 것이다. 대학이 입주하고, 다양한 인문학 강의가 개설되고, 스타 탄생의 스토리를 엮어낼 천재창업을 키운다.


지난해 말 제1판교의 맞은편에 기공식을 한 제2판교(넥스트 판교)는 제로시티(탄소 배출, 자동차 운전자, 사고 등이 없는 도시) 개념으로 세워지는 최첨단 스마트 도시다. 내년 말 준공될 예정이다. 판교는 프로의 세계다. 가벼운 창업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글로벌 지향이다. 경제를 소모하는 데가 아니라 경제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판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기흥 삼성전자 밸리와 당당히 겨룰 크고 작은 기업군이 판교에서 크고 있다.


판교는 창조경제의 입구가 아니라 출구다. 창조경제 정책은 이제 숫자로 말해야 할 때다.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의 동반성장을 도모할 과학기술 지역 확산과 이를 뒷받침할 산·학·연 협력이 창조경제의 성패를 쥐고 있다. 지금 판교를 주목하는 이유다.


곽재원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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