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극물 협박범에 공동투쟁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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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창태<편집부국장겸 사회부장>
한국판「모리나가 독극물사건」이 시민들을 불안에 몰아넣고 있다.
지난해 3월이후 근1년째 이웃 일본사회를 시끄럽게한 사건이 불과 몇 달만에 그수법그대로 서울서 재현됐다.
한일의 거리가 얼마나 가깝고 긴밀한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면서 생각나는 것이『말을 배우라니 욕부터 배운다』는 우리 속담이다.
국교정상화이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넓고 깊어져온 두 나라의 교류를 놓고 일부에서는 「정치적 유착·경제적 예속·문화적 식민」이란 극단적 비판까지 있는 마당에 이제 자칫 범죄식민지(?)의 불명예까지 추가될 판이다.
교통·통신·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달로 세계가 이른바 지구촌화하면서 범죄도 국제간 아이디어와 노하우의 교류가 활발해지게 마련이다. 비슷한 유형의 범죄들이 세계곳곳에서 범람하는「유행」의 양상을 띠고있는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우리나라도 형법범은 연간 29만건 안팎으로 양적으로는 큰 증감이 없지만 질적으로는 중대한 변화를 나타내고있다.
살인·강도·강간같은 전통적인 범죄외에 산업화단계에 오른 80년대이후 거액의 보험금을 노린 살인상해·컴퓨터를 조작한 공금횡령·유괴, 그리고 불특정다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기불명의 범죄등이 늘어나고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다. 이런 범죄는 못먹고 못입는 절대빈곤에서 저질러지는 범죄가 아니고 보다 잘먹고 잘사는 타인을 선망한끝에 일확천금을 꿈꾸는 범행이라는데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되는 한탕주의 재산범이다. 여기에 단순히 사회에 대한 불만을 발산시키기 위한 표적 없는 범죄까지 근래엔 등장하고 있다. 식품회사 독극물 협박사건도 거액의 돈을 목적으로한 재산범이다.
일정한 수입도 없는 사람이 분수에 맞지않게 호화주택에 살면서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아파트 투기로 몇천만원이 하루아침에 오가는 풍조속에서 돈을 보고 눈이 뒤집혀질 사람이 나올수 밖에 없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요행과 요령이 빛을 보는 사회에서 이런 범죄도 배태된다. 정부마저도 그동안 외국빚을 끌어다 호화잔치를 벌이고 세입이상의 적자예산을 짜 전시위주 행정을 일삼아 국민전체의 욕망을 비대시키는데 한몫을 했다.
우리사회의 심층으로부터 급속한 변화를 실감케하는 쇼킹한 범죄가 발생하는 것도 그동안 뿌린씨를 거두는, 이를테면 부머랭효과일 뿐이다. 사회는 그것에 상응하는 범죄를 낳게 마련이고 범죄는 사회현상의 반영이다.
대량소비상품을 매개로 대기업을 협박하는 범죄도 근래 개발된 새로운 유형이다. 남의 나라 얘기로만 듣던 것이 우리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범인은 대기업을 공격하면서 전체시민의 목숨을 인질로 총부리를 겨누었다.
범인들의 범행은 사회전체에대한 도전이랄 수밖에 없다.
이웃 일본의 경우 바로 이같은 인식에서 협박을 당한 회사만이 아니라 전체사회가 범인들을 향해 공동투쟁에 발벗고 나서는 슬기로운 대응을 보이고있다.
범인의 협박에 굴복하는 것은 또다른 범행을 유발하고 그 결과는 소수의 악당이 전 사회를 포로화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할 우려를 낳는다.
굴복없는 정면대결만이 범죄를 없애는 길이다. 범인들의 협박으로 곤경에 처한 기업을 범시민적으로 돕자고 나서는 일본사회의 캠페인은 사뭇 감동적인 미담조차 낳고 있다.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를 재인식시키는 계기도 되고있다.
우리의 경우 비록 처음당하는 본격적 산업범죄이지만 경찰이나 해당기업이 처음부터 적절한 대응을 못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됐다. 경찰은 한달 이상 사건을 쉬쉬하면서 멍청한 수사로 나타난 범인을 두 번씩이나 놓쳤다
해당기업은 기업대로 소비자의 생명보다 눈앞의 손익판단을 기준으로 어리석은 처사를 한 인상을 지울수 없다.
바로 범죄의 표적이 되고있는 당사자인 시민의 입장에서 한달 이상이나 계속 진행되고 있는 범행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해당기업이나 경찰이 다같이 국민과 소비자를 배신한 것이다.
경찰은 뒤늦게 중간수사결과라고 알맹이 없는 발표를 했지만 앞으로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시민과 함께 범인을 잡겠다는 솔직한 자세를 보여야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소비자의 눈과 귀를 가리려고만말고 용기있는 정면대결에 나서야한다.
악당들에게 협박당하는 기업을 보호하고 성원함으로써 범인의 협박을 무효화하는 것은 그다음 소비자인 시민들의 승리요,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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